개인 주권 문화 vs. 대중 조작 문화
제 12장, 기록 #2 하톤
1991년 4월 6일 토요일, 11:12 A.M. 4년 233일
인간 언어의 한계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언뜻 그 제목이 주는 첫 인상보다, 훨씬 더 “이 저널 본연의 주제로 되돌아 가는” 내용이 되리라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의미있는 이해 속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각자각자가 저마다의 의도를 가진 단일 개체들로서 원활히 기능할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인 상호간의 이해 상태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속에 머무는 것은, 명백히 우리의 적들이 의도하는 공격 양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를 곧잘 속이며, 성스러운 영혼[Holy Spirit]의 신성한 하나님[Divine God]의 뜻에 반하는 것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입니다. 어떤 “용어”를 사용할 때, 이에 대해, 완벽하게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릴 필요성에 관한 좋은 예가 한가지 있습니다. 대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용어를 사용할 때, ‘명백하게[EXPLICITLY]’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한은, 그 용어 자체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뜻에 대한 용어인지, 하는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빛의 영혼에 반하는 자들[the anti-Lighted Spirit]의 공격 양상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 하나의 주어진 용어에 대해서, “그들 간의” 사용에 있어서만, 단일의 명백한 정의를 갖는 것입니다.--반면 모든 다른 사람들은, 비록 그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쉽사리 이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종종 정반대되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기도 하는 상태를 방치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위대한 영혼(정령)[the Great Spirit]’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God]’, ‘빛의 하나님[Lighted God]’, ‘신성한 하나님[Holy God]’, ‘진실[Truth]’, ‘와칸 탕카[Wakan Tanka]’, ‘위대한 백색 (빛의) 영혼(정령)[Great White (lighted) Spirit]’, 기타 등등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난다[Sananda]”라고 말할 때, 이는 ‘그리스도적인 경험[Christed experience]’을 통해, ‘하나님 속에서의 경험, 혹은 하나님으로서의 경험[experiences as/whthin God]’을 체험하며, ‘성취되는 완벽함[achieved perfection]’에 대해 붙이는 ‘명칭[label]’으로서, ‘창백한 예언자[Pale Prophet]’, ‘이수[Esu]’, ‘이사[Isa]’, ‘이이사[Iisa]’, ‘서있는 곰[Standing Bear]’, ‘예수[Jesus]’, ‘나사렛 사람[The Nazarean]’, 기타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의 의사소통의 상황에서 사용되는, ‘특정 용어’에 대한, 이러한 예들을 우리가 굳이 더 들지 않더라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호한[IMPLICIT]” 상태에서 작업하기를 반드시 멈춰야만 하며, 항상 “명백함[EXPILCITNESS]”을 갖고서 처신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호한[IMPLICIT] : 암시적인; 추정적인; 표현되지 않은 어떤 다른 것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가는 관련된 어떤 것, 혹은 추론을 수반하거나, 이를 유도하는.
명백한[EXPlCIT] : 모호함과 불분명함이 없는; 완전히 개진되거나 형성된; 표현에 있어서 유보적이거나 애매하지 않은; ‘모호한’에 반대되는.
정확한 의사소통은 정확하고 명백한 표현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간의 이해
의사소통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을 가진, 이 우주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들에 의해 명백히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각 개인들이 보유한 ‘타고난 가치판단[Inborn value judgments]’은, 이 ‘유형의 실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선별하고,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로서, 저마다의 개인들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유형의 실체들’과 ‘타고난 가치판단’이 결합될 때, ‘자연의 우주적 언어[the universal language of Nature]’가 형성됩니다. 그리고/또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력을 가진 창조적 지성체[comprehensive creative intelligence]’는 자연과 공존할 수 있게 되며, 또는,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말로 된 언어들[word languages]’을 창조합니다. 서구 세계에 있어서, 이 ‘말로 된 언어들’은 종종 육체와 영혼 사이를 구별 짓고, 또 사람들은 “자연과 자연의 신[Nature and Nature’s God]”을 구별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다른 한편, 서양인들과 동양인들을 공히 아울러, 이들 모두에게는, 범신론[pantheism]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널리 퍼져있는 사고 패턴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자연’과 ‘자연의 신’을 하나로 보는 관점입니다. ‘자연’과 ‘자연의 신’을 구별하는 사고 패턴과 구별하지 않는 사고 패턴, 이 두 패턴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서, 또, 이 두 가지 사고 패턴들 간의 차이점에만 너무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통상적인 사고 패턴들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속임수와 오도를 야기하는 이러한 사고 패턴들을 통해서 ‘조작된 것들’을 식별해 낼 수 있을만한 역량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에 의해 창조되어 온, 혹은 창조될 수 있는, 모든 ‘말로 된 언어들’은 조악한[crude] 것들로, ‘자연의 언어[the language of Nature]’ 혹은 ‘자연의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Nature’s God]’를 대체함에 있어서 혼동을 야기합니다. 만약 누군가, ‘자연의 신[Nature’s God]’도, 의사소통 상에 혼동을 야기하는, 이 조악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단언한다면, 그 자는 다른 사람들을 세뇌시키려고 애쓰는 자이거나, 혹은 이미 세뇌된 자인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들 사이에서도, ‘말로만 이루어지는 의사소통[communication in words]’이, 완전하고 종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합니다. 지각력을 가진 어떠한 인간도, 경우에 따라, 말(글)로 하는 의사소통이 적합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떠한 ‘사회적 동의[social agreement]’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이란, ‘자연의 언어 혹은 자연의 신의 언어’(가치 판단과 힘(의도), 의지를 수반하는 것)가 취해져야만 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을 변경시킬 때, 그리고 ‘문화들[cultures]’을 창조해 낼 때, ‘자연의 언어와 자연의 신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오도된 다양성들[misled multitudes]’, 그 중 예를 들자면 하자르[the Khazar]라 이름 붙여진 특정 문화적 양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해당 문화의 구체화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광범위한 측면에 걸친 “문화들[cultures]”에 반드시 초점을 맞춰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화들”은 ‘유기적 개체들’이 살아남도록 고무하거나, 혹은 살아남는 것을 허락하는 데에 있어서, 선택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의지적 행위들[will-actions]’입니다. ‘옥수수의 문화(재배)[the culture of corn]’는 옥수수의 생장에 알맞은 조건들을 만드는 일을 수반하며, 그들의 생장을 방해하는 다른 유기적 개체들을 파괴시킵니다. (‘옥수수의 문화’라는 표현에 있어서, ‘문화[culture]’의 의미는 ‘재배, 양식, 사육’의 의미를 갖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화’라는 단어와 여기서의 ‘재배, 양식, 사육’이라는 뜻의 ‘문화’가 궁극적으로 ‘의지적 행위들’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공통의 맥락을 형성함--역주) ‘인간 의지[Human will]’는 옥수수의 문화(재배), 콩의 문화(재배), 튤립의 문화(재배), 돼지의 문화(사육), 염소의 문화(사육), 양의 문화(사육), 젖소의 문화(사육), 식용 육우의 문화(사육), 노동력 제공용 말들의 문화(사육), 경주마들의 문화(사육), 기타 등등의 것들을 창조해 왔습니다. ‘문화들’은 인간 역사의 주요 요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이 대개, 똑바로 지적하거나, 논의하기를 꺼려하는 두 가지 문화들이 존재하는데, ‘이해 부족’으로 인해 그러기도 하고, 혹은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른 목적들 때문에, ‘의도적으로 다루기를 회피’하기에 그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문화들 모두는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human cultures of humans]’(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들의 ‘인간 재배, 인간 사육 방식들’--역주)입니다. 이 두 가지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이 이 글의 기본 주제입니다.
원시 문화
최초의, 혹은 가장 원시적인 ‘인간들의 인간 문화’는 사람들이 사냥과 채집 활동으로 식량을 구해 살아나가던 단계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 원시 문화는 여전히, 활발히 고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화는 당신들에게 심각한 염려를 불러 일으키는 문화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과 자연의 신[Nature and Nature’s God]’이 제시하는, 명백한 ‘장-범위 방향성[long range direction]’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Nature’s long range direction]’은, 단일 세포들에서부터 인간들에 이르기까지 다 적용되는 것으로, 생존에 가장 인지적(자각적)이고[perceptive], 가장 적격인 방식을 선택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시 문화는 그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잘못 사용되는(오류를 수반하는) 인간의 말들(언어들)[falsely used human words]’이 그 도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이 첫 번째 인간 문화는, 지도자들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무능력한 자들이, 상징적인 지도자를 만들어 내고, 또 자신들이 이 상징적인 지도자의 대변인들임을 자처하여,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을 띠는 것은 모두 ‘하나의 단일 문화’이지만, 그 상징적인 지도자는 여러 가지의 모습들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널리 존경받던 죽은 지도자의 “귀신”이 그러한 상징적인 지도자에 부합하는 첫 번째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록된 역사가 처음으로 남겨지던 무렵, 하나의 돌 “신”[a stone “god”], 혹은 보이지 않는 “신”[an invisible “god”]이, 서구 사회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그와 같은 대상이었습니다. 대변인들은, ‘인간의 말들’을 사용하여, 이러한 대상을 일컫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제기하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조종[manipulating the people]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한 명의 “대변인”이, 혼동과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자들로 구성된, 한 ‘무리’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조작된 무리[the manipulated group]’를 이용하여, 자신의 말들(언변들)[words]을 통해 꾸며온 ‘허위’를 알아차리게 되거나 혹은 이에 반대하는 ‘개인들’을 파괴시켰던 것입니다. ‘무리를 조작하는 힘[manipulating group force]’을 이용하여, 그는 자신보다 더 분별력이 있고, 더 정직하고, 더 역량있는 개개인들을 철저히 파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제들[priests]”이라고 불렸던 ‘조수들’은 말들로 꾸며진, 이 허위를 잘 떠받들던 자들로서, 이들은 이러한 문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보존, 발전시키고, 증진시키는 업무를 맡도록 선발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조작에 취약한 더 많은 대중을 양산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상상의 지도자’의 대변인들임을 자처하던 이 사제들은, 그들이 말로 만들어 낸 허위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종속적이고, 어리석은 자들을 상대로, ‘성관계’에 대해서도 “권위적인 통제”를 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조작된 무리’를 이용하여, 대중 조작꾼들인 자신들이 만들어 낸 표현 가운데, “권위”라고 불리는 것에 복종하길 거부할 만큼, 충분히 강하고, 자부심이 높은 개인들, 말하자면, 역량있고, 분별력이 있는 개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권위”를 거부하는 자들이, 함부로 “공인되지 않은” 성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막아 나섰던 것입니다.
‘언어로 된 기록물을 남긴 역사가들[word historians]’이 처음으로 당시의 사건들을 전하게 되었을 무렵, 그 같은 기록사에 등장하는 인간 종들의 상당 부분은 명백히 이처럼 자연에 반하는 문화 속에서 길러진 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미 ‘조작된 대중’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퇴보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록 사가들은 대개 “사람들이 ‘조작된 대중’의 모습으로 퇴보되었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이러한 상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그들은, “인류가 문명을 창조했다”는 다분히 찬양적인 문구를 사용합니다. 사제들이나 마찬가지로, 많은 “역사가들”은 ‘유형의 실체들[tangible realities]에 대한 인식’을 흐리는 말들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역사는, 그 기록들이 ‘유형적인 실체들’로 남아 있는 역사입니다. 분명하고, 정확하고, 뚜렷하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즉 명백한[EXPLICIT] 기록들입니다. 인간들이 계속해서,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 속을 살아 나아가는 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기록사에서 늘, 자연에 의해 설정된 진화 방향과 반대되는 쪽으로 나아가는 ‘살아있는 조직체들[living organisms]’에 관한 언급들만을 발견하게 될 따름입니다.
이러한 지적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당신들은 레밍 쥐[lemmings]나 양이나 기타 다른 포유류들도 분명히 그룹을 지향해 나아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포유류들 가운데에서도 인간들만큼이나 이렇게 ‘대중 조직체[mass organisms]’를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멀리까지 진화해 온 동물은 없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대중과 유리된 채, 개개인들이 생존해 나가는 일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진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조작된 대중은, 지구 위의 생존 공간 상에 존재하는 모든 평방 피트들을 다 구획짓고, 그 각각의 구획된 영역들이, 이 조작된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저마다의 개인들에게 할당된 공간이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어떤 다른 포유류들 가운데서도 인간들만큼 이렇게 ‘조작된 대중’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멀리 나아간 동물들은 없지만, 몇몇 곤충들 가운데서는 인간들과 같은 방향을 따라 진화해 온 예들이 있습니다.--개미들, 흰개미들, 그리고 벌들 가운데 몇몇 종류들.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나아갔기에,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러한 곤충들은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Nature’s long range direction]’에 반대되는 쪽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들은 ‘자율적인 성적 개체들[autonomous sexual entities]’의 상태에서 ‘무성의 그룹 조직체[asexual group organism] 안에서 마치 단일 세포와도 같은 기능만은 지닌 개체들’의 상태로 퇴보해[regressed] 온 것입니다. 이들의 경우, ‘군집을 이룬 조직체[the group organism]’만이 ‘의지를 가진 하나의 실체[an entity having will]’로서의 기능을 지속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곤충들은, 처음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말들[words]’을 이용하여 행한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관계 정립을, ‘성적 유인을 이끄는 냄새들[sex odors]’을 이용하여 행했습니다. 모든 인간 종들은 대중 조작자들에 의해 활발히 고무되는 퇴보적 진화를 거듭해 왔으며, 오늘날, 대단히 위험하게도 그 “완성 단계”에 접근하게 된 것입니다.
……
제 13장, 기록 #3 하톤
1991년 4월 6일 토요일, 2:33 P.M. 4년 233일
교정 문화[The corrective culture]
처음으로 역사가 기록될 당시 남겨진 기록들 가운데 어떤 기록들에 대해서는, 이를 없애버리기 위한 노력이 무수히도 많았지만, 여전히 살아 남아 있는 것들(심각하게 훼손되고 짜집기 된 상태이긴 하지만)이 있는데, 이에 따르자면, 당시, 어떤 사람들은 인간 종들에게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알아 차렸었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강구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인식 역량을 의도적으로 낮은 수준에 묶어 둔 채, 이들을 계속적으로 ‘재교육’시켜, 구속적인 양상 속으로 몰아가려는 정황들을 깨닫게 된 몇몇 분별력을 갖춘 인간들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이 자들은 바로 북유럽인들[the Northern Europeans]로서,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혹은 누구의 땅도 아닌 땅)[a no-man’s land]’이 될 수 있도록 유지시키는 일을 통해, 자신들의 격리 상태를 보호해 왔으며, 또 오랜 세월 계속되어 온 ‘원시 문화’와 정반대의 대척점을 이루는 문화를 일구어 왔던 것입니다.
이들 분별력을 가졌던 자들이 이해하게 되었던 대단히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하나의 문화는 단순히 ‘말들’을 가지고서 이에 대응하여 다투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들은, 하나의 문화는 또 다른 문화를 통해서만 맞서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하! 이제야말로 우리는 먼 옛날 있었던 일들 가운데 반짝거리는 빛을 냈던 무언가를 보기 시작하게 되는군요. 이제야말로 우리는, 현재 당신들이 위치해 있는 곳으로 당신들을 이끌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또 누구에 의해 당신들이 조작되어 온 것인지를 알아 보기 시작하게 되는군요.
‘자연의 신[Nature’s God]’은 조악한 인간의 언어들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자연의 신의 언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그 언어’ 속에서 행해진 ‘진술[a statement]’과 같은 것입니다. 문화는 ‘탄생과 죽음[birth and death]’의 문제를 개별적인 잣대를 가지고서 다룹니다. 비양심적인 조작자들이, 그들의 ‘인간들의 인간 문화(인간 재배 방식, 인간 사육 방식)’[their human culture of humans]를 만들어 낼 때, 그들은 자연의 언어 속에서, 자연의 신에 의해 설정된 방향에, 반대되는 쪽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교정 문화[the corrective culture]’는 의도적이면서도 분명하게, 그리고 능동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원시 반-자연 문화[the primitive anti-Nature culture]’에 명백히 반대되는 방향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문화들은 영구적으로 상호간에 양립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교정적인 인간들의 인간 문화[the corrective human culture of humans]’는 분별력을 가진 개인들로 구성된 그룹에서, 그들간의 동의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을 의도적으로 양성해 내는 일을 막아내고, 또 이러한 행위를 일삼는 조작자들을 축출하는 문화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이 문화는 충분히 훌륭한 문화였던 것입니다.
격리된 북유럽인들이 만들어 낸 이 새로운 문화 역시, 효과적인 문화를 만드는 두 가지 요소, 즉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교정 문화의 기본적인 개념과 행위 원칙들은, 두 가지 아주 단순한 내용들이었습니다.
1. 자녀를 갖는 것은 개인의 결정 사항이었습니다. 분별력을 갖춘 여자는, 분별력을 지닌 자신의 성관계 상대방을 고를 수 있었고, 역시 분별력을 갖춘 자녀들을 낳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대중 조작자들이 주창하는 생식 방식들(대중 조작자들은 자신들이 성관계를 “통제”할 권한을 가졌다고 부당하게 주장하며, 그들의 “권위” 아래 허용되지 않는 성관계를 금지시켰던 것입니다.)에 반대하여, 북유럽인들은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는 점에 동의하였고, 그녀가 누구의 아이를 가질 것인지는 오직 그녀만의 배타적인 권리로 보았던 것입니다.--한 개인으로서의 권리. 어느 누구도 무력이나 강요로 그녀와 성관계를 가질 수는 없다는 점,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자녀들의 아버지를 선택함에 있어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승인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 있어서 사회적 동의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분별력을 가진 자들은, ‘자연’의 ‘무형의 부분[the intangible portion]’에 대해, 그리고 각 개인에게 내재해 있는 ‘자연의 신’으로부터 비롯되는 ‘무형의 부분’에 대해, 말로 만들어진 “권위”[any word-invented “authority”]를 행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가치적 판단들은, 그 자 안에 있는 신(하나님)[the God within]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여자들에게 있어서, 누가 자신의 자녀들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이 대단히 중요한 가치 판단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간섭도 허용될 수 없다고 하는 사회적 동의는, 결국 사람들이 각각의 여자들을 저마다 한 명의 ‘여신[goddess]’과도 같은 존재로서 우러러 보는 풍토를 효과적으로 조성해 냈습니다.
2. 죽음을 다루는 문제 역시 개인적인 결정 사항이었습니다. ‘조작된 대중을 이용하여 개인들을 유린하는 일’을 막아내는 것이, 이들에겐 중요한 문화적인 양식이었습니다. 각 개인들은 저마다의 특권의 하나로서, 마찰을 빚는 상대방과, 공식적이고도 사회적으로 인정된, 일대일의 “공정한 결투[fair fight]”를 펼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무분별한 선동가들은 축출될 수 있었습니다. 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결투에 대해서는 ‘완전한 사회적 동의[full social approval]’가 형성되었던 반면, 어떠한 단체라고 할지라도, 특정 단체가 “단체의 의지[group will]”를 개인들 위에 강요하는 일은 ‘완전한 사회적 배척[full social rejection]’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인들을 상대로 단체가 조직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은, 오직 개개인들이 동의했을 경우라고 하는,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었습니다. 이 엄격하게 제한적인 범위 바깥의 사안에 있어서는, 각 개인들이 일대일의 개별적인 결투를 요구할 수 있었고,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는, 이를 지지해 주는 완전한 사회적 동의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탄생과 죽음에 대하여, ‘자연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이 문화는, 분별력이 떨어지는 ‘좀비와 같은 인간들[zombie-like humans]’을 양산해 내고, 또 말로서(화술로서) 좀비들을 조작하는 비양심적인 선동가들을 양산해 해는, ‘원시 문화’를 효과적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었습니다. (저런, 당신들은 지금 어디쯤 와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새로운 문화는, 모든 개개인들이 동등한 주권을 가졌다는 주장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펼쳐 왔으며, 원시 문화의 존재 이전에, 자연이 항상 설정해 두었던 바 그대로, ‘자연의 선택 방향[the direction of Nature’s selection]’을 향해 실질적인 가속 페달을 밟아 나왔던 것입니다.
기록된 역사가 남겨지기 시작하던 무렵, 이 새로운 문화는, 벌써 그 이전서부터, 이 격리된 북유럽인들을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종류의 사람들로 양성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차이점들을 더욱 북돋아 나갔습니다. 어떠한 ‘조작된 대중’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이 북유럽인들만의 보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no-man’s land]’ 안으로 침범해 들어와, 북유럽인들을 그들의 세력 안에 흡수하려고 들면, 이들은 ‘잠재적인 대중 조직체[a potential mass organism]’로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변모해 나가는 단체로서의 객체[the evolving group entity]’는 “용[dragon]”이라고 불렸습니다. 용을 베어 쓰러뜨린 위대한 영웅들에 대한 무용담은, 이 문화권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와 노래 속에서 늘 기억되었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용[dragon]”, 그리고 “용과 같은 괴물[dragon beast]”이라는 표현들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바로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선택
이 두 가지 반대되는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을 다음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표현들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 조작된 대중 문화[The culture of manipulated masses]와 개인 주권 문화[The culture of individual sovereignty].
양쪽 모두로부터 한 발 떨어져서, 단순히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각자 스스로에 대해 성찰해 볼 것 같으면, 이에 대한 선택은, 두 가지 문화의 산물들인 각 ‘개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 1) 조작된 대중 문화는 분별력이 결여된 인간형 그리고/또는 ‘의도적인 거짓’에 친화적인 인간형을 낳습니다. 또 이 문화는 한 명의 똑똑한 조작자[manipulator]가 만들어 내는 속임수와 같은 것들에, 강한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끼는 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한편, 2) 개인 주권 문화는 지각(분별)력[perception]과 통합성[integrity]을 지닌 자들을 낳고, 조작자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이 두 가지 문화들은 ‘30억년도 넘은 자연의 오래된 판단 기준[Nature’s three billion year old criteria]’에 따라 평가될 것입니다.--이것은 바로, “자연과 자연의 신(빛의 위대한 영혼[Great Spirit of Light], 신성한 하나님[Holy God], 그리고 창조[the Creation])의 도덕성[the morality of Nature and Nature’s God]”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작된 대중들이, 개인들을 상대로 역전불가능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을 때, 그러한 대중들은 점차적으로 유일한 ‘조직체들’이 되어갈 뿐이며, 이 조직체들만이 ‘유효한 의지[effective will]’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들은 ‘무성의 조직체들[asexual organisms]’로서 기능합니다. ; 반면, 개인들은 해당 조직체의 구성 세포들로서 기능합니다. ; 그렇게 될 때, 진화는 역방향으로 6억년 정도 혹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의 선택적 생존[Nature’s selective survival]’ 대상이,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에게서, 이 ‘새로운 대중 조직체들’에게로 전이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이 ‘새로운 조직체들’ 간의 전면적인 전쟁 상태가 영구적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개인들이 주권을 보유한 채로 남아 있게 될 때, 자연의 초점[Nature’s focus]도 개인들에게 맞춰집니다. ‘자연의 선택적 생존’은 계속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적용되며, 이 경우 퇴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존의) 장은 보다 나은 발전을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명백한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에 비추어 볼 때, 인간 종들은, 최초의 원시 인간 문화보다 훨씬 더 퇴보한 형태라 할 수 있는, 완전한 ‘조직체적 진화[organic evolution]’를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 주권’에 대한 ‘사회적 승인[social approval]’은, ‘자연의 도덕성[nature’s morality]’에 대한 ‘사회적 승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판단 기준을 통해 볼 때, 선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인간들은 ‘자연의 장-범위 방향성[Nature’s long range direction]’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배척할 것인가? 나는 당신들이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이 글에서 제기되는 관점, 그리고 당신들로부터 여태 감춰져 온 “비밀들”의 공개 내역을 되짚어 보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숙고해 보십시오.
문화 충돌의 장[The field for Cultural Conflict]
이제 일반화된 설명을 벗어나, 이러한 두 문화들의 주창자들 간의 실제적인 충돌 양상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대중 조작자들이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정부들과 언론매체들, 그리고 교육 시스템들에 대한 통제력을 쥐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 낸 혼동스러운 역사 버전[their confusing version of history]’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압도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이리저리 난도질당하고 파편화된 것이긴 해도, 중요한 이야기를 충분히 재구성해 볼 수 있을 만큼의 (내 조사원들의 도움을 굳이 받지 않아도 될 만큼의) ‘역사의 조각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두 문화권 사람들 간의 주요 전투들은, 유럽에서, 지중해 연안에서, 그리고 서반구의 각지에서, 발생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발생하고 있습니다.--이 지역들은, 조작된 대중 문화의 완전한 침투와 그로 인한 ‘조직체들’의 형성 과정을 겪어 왔습니다.
동양인들은, 오늘날 서구 세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조작된 대중 문화’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에서만 살아 왔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경험해 온 것과 같은, 두 문화들 간의 충돌에 개입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경우, 이들 사이에서도 이 두 문화간 충돌 양상이 점차 뚜렷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동양인들은, 비록 그러한 양상이 조금씩 조금씩 더 드러나 보이긴 해도, 현재 그러한 충돌 양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며, 과거에 그러한 충돌 양상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분명코 그들은, 오늘날 서구 사회에 존재하는 조작된 대중 문화 이외의 다른 형태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거의 발견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 충돌 양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러시아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몇몇 예민한 자들이 고개를 내밀어 ‘이 커피 타는 냄새’를 맡기 시작하긴 했지만, 대체로 볼 때 그러한 것입니다. 러시아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존재하며, 생물학적으로 양쪽이 혼합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하자르, 언어 왜곡자들의 수완[the Khazarian shroud of word twisters]’ 아래, 커다란 영향을 받아 온 곳입니다. 하나의 정부로서 소련 정부 역시, 너무나도 뚜렷한, ‘조작된 대중 문화’를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현 러시아 문화의 정확한 양상 역시 동일한 기원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즉, 인간 종들에게 치명적으로 위험한 그 동일한 문화, 바로 현재 서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 충돌의 한 쪽 축을 형성하고 있는, ‘조작된 대중 문화’인 것입니다. 이 대단히 치명적인 문화 양상이 러시아인들에게 몰려 들어 온 것은, 두 번의 ‘물결’을 통해서였습니다. ‘첫 번째 물결’은 10세기 무렵 시작되었으며, ‘두 번째 물결’은 12세기 초에 밀려 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지역에는 어떠한 실질적인 ‘개인 주권 문화’도 존재했던 적이 없었기에, 두 번의 ‘물결’ 모두 효과적인 토착민들의 저항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동양인들과 러시아인들 양쪽 모두는, 자기 자신들 내부에서, 개인 주권을 향하고자 하는 충동을 계속적으로 느끼고 있으나, 그들은, 하나의 문화로서, 개인 주권의 경험에 관한 어떠한 의식상의 기억도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서구의 미국인들은 개인 주권을 경험해 왔기에, 더 이상 그들이 개인 주권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언어 조작자들[word manipulators]이 몇몇 사악한 속임수들을 써서 당신들을 끌어들였기에, 오늘날 당신들은 “그들의” 기만과 환영의 덮개에 가려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문화의 주창자들 간의 전투는 서구 세계[the Western World]에서만 있어 왔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가 형성된 곳이 바로 서구 세계였습니다. 오늘날, 이 문화에 대한 의식적인 주창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도 이 곳입니다. 현재, 이 두 문화의 주창자들 간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 역시, 서구 세계입니다.
서구 세계에는 아직도, 높은 비율의, 개인 주권 문화 속에서 양성된 사람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문화를 양성해 내는 의식적인 주창자들은, ‘겨우 꺼지지 않은 희망[the only visible hope]’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가 퇴보적인 곤충들의 길로 나아가는 일을 막아낼 수 있는 가냘픈 희망의 명맥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희망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the only visible hope]’에 불과해서, 개인 주권 문화 속에서 양성된 많은 자들도, ‘말들[words]’로 인한 혼동 속에 빠진 채로, 두 문화의 주창자들 간에 벌어지는 충돌을 잘 파악해 내지 못합니다. 만약 그들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할 결심을 하기 이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일단 한 번 지켜보기로 하자”고 말한다면, 그들은 실상, 그들이 “단지 자연의 흐름 속에 사태들의 전개를 맡겨 둔 것”이 아닌 셈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 문화들은 ‘자연의 선택[natural selection]’ 속에 맡겨져 왔습니다. 충돌은 ‘인간 의지[human will]’로 인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때, 사실상, ‘모든 것들’을 ‘그들의 (반대쪽) 인간의 적들[their human enemies]’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말들로 된 장막[a veil of human words]’은, 분별력을 갖도록 길러진 많은 자들의, 분별력 위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충돌의 장을 가리는 구름들
“인류의 진보[human progress]”라고 불리는 이 혼동스러운 주제는, 두 문화의 주창자들 간에 벌어지는 이 의미심장한 충돌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롭게 제작된 기계 장치들’에 초점을 두게 만들어, 인간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조작된 대중 문화의 대변인들은 이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기계 장치들’을 갖다 놓고, 문명의 수준의 척도인 양 자랑하고, 미국의 학생들에게, 2천년 전 북유럽에는 “야만인들[barbarians]”만이 살고 있었노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 고고학적 발굴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세련된 수준의 제작품들이 개발되었던 것은 유럽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들은, 단지 논리적인 역사적 추론을 통해, 북유럽인들은 인공품들[man-made things]을 거부하고, 그들만의 가치 기준을 따라, 자연으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만, 이야기의 초점을 딴 곳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이에 대한 설명에 더 매달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전된 역사[the verbal history], 혹은 “신화[mythology]”는 당신들이 사는 곳이 지금껏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왔으며, 완전히 뒤틀려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오직, B.C. 60년경,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북유럽인들에 대해서 서술한 것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나, 그의 글에 묘사된 ‘개인 주권 문화’는, 그 보다 앞서, 언급되지 않은 무수한 세기들에 걸쳐 존재해 왔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개인 주권 의식을 가진 자들만을 선별적으로 양성해 내던 이 문화의 정수는, 시저의 침입 시도에서 불구하고, 이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the no-man’s land]’ 속에서 효과적으로 보호될 수 있었습니다. 일방적인 통행만이 허용되었습니다. 북유럽인들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땅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격리된 문화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개인 주권을 지지하는 개개인들로서[as individuals], 그들은, ‘잠재적인 대중 조직체들[potential mass organisms]’, 즉 그들이 ‘용들[dragons]’이라고 부르던 대상들과 맞서 싸워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외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러한 충돌도 그저 통상적인 집단과 집단간의 전쟁, 즉 외부인들인 자신들의 문화의 본질적인 요소를 구성하는 타입의 전쟁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 간의 충돌이, ‘충돌의 본질’을 이루었던 것으로, 당신들이 찾아 볼 수 있는 기록 상에 등장하는 가장 최초의 사례는, 초기 바빌로니아인들[the early Babylonians]과 이란 고원[Iranian plateau]을 점유하고 있던 사람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 기록 속에는 오직 그들 간의 충돌의 “외양[color]”에 대한 묘사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서, 문화를 축으로 한 사람들 간의 분열 양상이, 북유럽 문화의 중핵을 이루던 개인 주권 문화인들이 다른 곳으로도 퍼져나가서 그렇게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란 대 바빌로니아 간의 투쟁이 그러한 분열의 기원을 이루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날의 당신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를 뭐라고 부르든 간에, ‘하자르인들[the Khazars]’이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함을 통해서, 우리는 이 탐구에 있어서 보다 나은 토대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문화를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당신들은 이 반대되는 문화를 주창하는 자들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찾아보고 이를 식별해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들은 그저 ‘문화의 쓰레기통’을 이리저리 뒤지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각각이 대척 지점에 있다고 할 만큼 정반대되는 이 두 가지 문화들은 결코, 단일의 사람들[one people] 속에서 섞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의 인간 문화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자연의 포괄적인 (진화) 방향[Nature’s overall direction] 혹은 그 반대 방향.
동시에 두 가지 반대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진술이 어쩌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들’에 관한 한, 오늘날 그러한 진술은 점점 더 분명히 요구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날 두 가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강요된 혼재 상태를 두고, “문화 융합을 통해 달성된 풍요[the richness achieved by mixing cultures]”라고 부르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언어 도단은 혼동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작의 일환인 것입니다.--자, 그럼 누가 혼동을 야기시키는 달인들일 것 같습니까? ‘문명’의 조각들은, 반대되는 문화들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혼재로 인해 파괴되어 왔으며, 마치 렌즈가 깨진 만화경[kaleidoscope]을 통해 조각난 상들을 바라다 보는 것처럼, 시야를 흐리게 하는 조각난 단면들만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를 ‘문화’라는 잣대만으로 보게 될 때, 문화란 ‘자연 선택에 대한 인간 의지의 투입(반영)[an injection of human will into natural selection]’인 것입니다. 자연 선택은 오직 탄생과 죽음의 문제만을 다룹니다. 인간 의지에 의해 형성된 문화들 역시,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갖게 되는 ‘살과 피’는, 생존을 위해 ‘인간 의지’가 선택한 방식에 따라 얻게 되는 것으로서, ‘자연 선택 상에 투입된(반영된) 문화[injecting cultures into natural selection]’로 인해, “성취되는 풍요(혹은 오염)[richness (or pollution) achieved]”에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대중 조작자들[mass manipulators]은 고의로 혼동을 야기시켜,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흐리게 만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야를 가리는 구름들’을 꿰뚫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 걸쳐, 개인 주권 문화 속에 양성된 사람들과 대중 조작 문화 속에 양성된 사람들이 혼재되어 살던 지역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향하는 문화 방향이 반대였기에 이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충돌에 대해서, 광범위한 역사적 관점 속에서의 통찰력 있는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해 왔습니다. 잘 알려진 역사 학자들 가운데, 슈펭글러[Spengler](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 1880-1936, 독일의 사학자, 철학자. ‘인간과 기술’, ‘서구의 몰락’ 저술--역주) 정도가 가장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긴 했지만, 그 조차도, 이 ‘혼재된 상태[the mixings]’를 두고, 단순히 “문화”라고 지칭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구에서의 생을 살아 나가면서, 빈약한 역사 자료들을 근거로, 상당한 지적 추론과 이해를 펼쳐 보였던 이러한 인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들은 개인 주권 문화 속에 양성된 일군의 사람들이 인도로 이동해 갔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인도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원시 문화(대중 조작 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권 사람들은 이 엄청난 숫자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속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세워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그들의 이상을 행동으로 바로 옮길 수는 없었고, 대신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기록된 역사가 남겨지기 이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두 문화들 간의 충돌은 말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권의 사람들이 혼재되었던 또 다른 예는 그리스에서 있었는데, 개인 주권 문화의 정수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반대 문화에 젖어 있던 그리스로 흘러 들어 갔을 때,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들 간의 의도적인 분리는, 임의로 사람들을 “시민”과 “노예”로 나누는 작업을 통해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같이 접촉을 가지면서 철저히 섞여 있는 한, 이러한 의도적인 분리는 분명코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었습니다.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두 가지 다른 문화적 사고 패턴을 가진 자들을 “합리적으로” 결합시킨 “과학적인(이상적인) 상태[scientific state]”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는, 결국 “그리스의 황금기[golden age of Greece]”로 불리는 시대가 무너지면서, 함께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중 조작 문화 속에 길들여진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에게 (그리스적 경험의) “통치술[the science of government]”을 전파해 줄 수 있을만한 제국을 건설해 보려는, 다소 무모한 시도 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유형의 문명[a tangible civilization]’을 만들어 냈는데, 이는 두 가지 혼합 문화 속에서 탄생된 것으로, 잘 익은 과일만큼이나 무르익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시대에 보다 강건하고 통솔력을 갖췄던 정력적인 몇몇 사람들(교사들)은, 이러한 혼재적 메커니즘 속에, 이해와 지혜와 통찰력을 불어 넣으려고 계속해서 애를 써 왔습니다.--이 시대, 지금 이 순간, 당신들 가운데 몇몇은 계속된 좌절을 맛보면서도, 대중을 일깨우기 위해 반복적인 시도를 지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 조작 문화[the culture of mass manipulation]에 완전히 동화되어 왔던 로마인들은,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의 혼재 속에 혼동을 겪고 있던 사람들(그리스인들)을 집어 삼킬 만큼, 충분히 강한 군사력까지도 보유한 상태에 있었고, 결국, 이들은 그리스인들과 그리스 제국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하지만, 정작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해 부족 상태에 있습니다.
조작된 대중 문화에 걸맞게 “교육받은” 자들이 기록한 역사 속에는, ‘전면 전쟁[mass warfare]’(하지만 이것은 인간들과 몇몇 퇴보해가는 곤충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살아있는 생명체들도 하지 않는 행동입니다.)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기술한 역사는 그저 대중 조작자들의 연구물들이자, 이들 대중 조작자들의 “권위”아래 행동해 온, 전장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기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 기록에 따를 것 같으면, 인류 역사상 조작된 대중 문화 이외의 다른 문화는 결코 존재한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리가 없을 것만 같은 암시를 줍니다. 그들은 ‘원시 문화’를 ‘인간 문화’로서 받아들이면서, 이를 인간들에게 적용시켜 표현할 때, “문화”라는 단어가 갖는 참뜻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 말의 뜻을 왜곡시켜, ‘문화’가 “교육을 통한 발전이나 진보, 혹은 그러한 발전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세련됨”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문화들 간의 충돌에 따른 방향성’의 문제는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문화들’은 ‘인간 의지의 특화된 사용[a specialized use of human will]’으로서, 바람[wind]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 바람과 같이 그 효과는 엄연히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당신들의 역사학자들은 오직 그 효과들만을 서술합니다. ;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지중해 인근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존재했었던,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을 지적해 내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런 게 있었던 것인지를 인식하지 조차 못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주의깊은 재검토를 통해, 당신들은 현재 진행 중인 문화 충돌의 시발점이 어디였는지를 식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전체 인간 종들의 운명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띨 것입니다.--인간들의 운명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문화 가운데 어떤 문화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것입니다. 이 대척점을 이루는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은 거의 간파되지 못했으며,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 3자적 관점을 가지고 살펴 본다면, 큰 그림이 눈에 들어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거국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마 당황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 두 가지 다른 방향성을 띤 문화들의 만남은 두 개의 바람들의 만남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런데, 반대되는 두 방향성을 띤 바람들이 만날 때, 파괴적인 폭풍이 형성됩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두 바람들이 만난 바로 그 때, 한 명의 그리스도적인 존재[a Christed being](당시의 시대 흐름 상으로 보자면, 그는 당신들이 ‘예수[Jesus]’라고 부르는 자였습니다.)가 왔고, 그는 이 “폭풍의 눈[eye of the storm]”에 의미심장하게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거대한 폭풍은, 전체 인간 종들로서 당신들 모두의 사활이 걸려 있는 폭풍인 것입니다.
제 14장, 기록 #4 하톤
1991년 4월 6일 토요일, 5:45 P.M. 4년 233일
오늘날의 충돌
지금 현재 인간 종들에게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알려진 역사[known history]’로부터, 의미있는 사건들을 잘 ‘걸러낸’ 다음, 이들을 의미있는 순서로 재배열해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화적 ‘폭풍’ 체계[the cultural storm system]는, 그 “폭풍의 눈[the eye of the storm]”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전체적인 조망 아래 관찰해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나는 이 특별한 “존재”에 대하여,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논리적인 설명이나 차이점들을 제시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 ‘존재’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 그리고 이와 수반된 것들에 대해서는, 주의의 끈을 놓지 않고 다룰 것입니다. 혼재된 문화들로 된, 오늘날 당신들의 삶의 영역 속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 “폭풍의 눈”에 대하여, 가장 공통된 관점들을 견지해 왔고, 또 그 특징을 잘 요약할 수 있었던 역사가들이 지금껏 늘 있어 왔습니다.
한편으론, 다음과 같이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 “그것이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간에, 그것이 사실이든, 허구이든 간에, 예수의 이야기는 인간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아마 엄청난 영향일 것입니다.)을 미쳐 왔다.” 미국에는 예수의 이야기에 관한 두 가지 뚜렷한 관점들이 존재합니다. 우선, 한가지는, 예수는 “초자연적인” 존재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견지하는 관점으로, 이에 따르자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원죄[sins]”를 갖고 있고, 예수는 사람들의 “원죄”에 대한 희생(대속)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앞선 관점의 사람들 모두를 싸잡아 “다시 태어난 바보들”로 폄하하는 자들이 갖는 관점으로, 이들은 예수와 관련된 전체 이야기는 결코 애당초 일어났던 적도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 내가 당신들에게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 유명한 “예수” 엠마누엘[Emmanuel of “Jesus”]은, 자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마저 부인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 인류에 대한 속임수나 미몽으로 변질되는 것 역시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당신들이 믿건 말건 간에.--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단순히 신화적인 이야기들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다른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작가들 혹은 분별력을 지닌 작가들은(그 중 몇몇은 그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제 3의 관점을 제시해 보였습니다. 그들의 관점이란, 예수의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가, 완전한 사실들만으로 구성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진술은 대부분의 당신들에게 한가지 놀라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예수의 “실제” 이야기 버전[one “straight” version]’을 담은, ‘미국 기독 성경[the American Christian Bible]’을, 자신의 서평을 담아 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당시 에릭 홀덴[Erik Holden]이라는 한 역사학자는, 존 할랜드[John Harland]로부터 시작된 작업을 이어 받아, ‘의미있는 사건의 조각들’을 걸러내는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해 오기도 했습니다. 홀덴은 ‘실제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많은 제도권 종교 단체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의 의미와 대조해 나갔던 것입니다.
제퍼슨이 편집한 성경 내역에는, 사도 바울[Paul]의 글은 모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들이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AND THEY CALLED HIS NAME IMMANUEL]”(피닉스 저널 제 2권--역주)라는 책을 다시 참조해 보고, 바울에 관한 사실들을 확인해 보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바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금 현재, 자신이 전파한 잘못된 정보들을 수정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180도 왜곡된 이야기들이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e]에서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제퍼슨 성경[Jefferson Bible]은, 모두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대개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그 보다 앞선 시점에 출간되었던 모든 성경 판본들에는, 하자르인들(유태인들)[Khazars(Jews)]과 유대-기독교인들[Judaeo-Christians]에 대한 변명에 가까운 언급들이 넌지시 들어 있었는데, 제퍼슨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자신의 판본에서는 배제했었던 것입니다. 홀덴이 ‘예수의 이야기’에 대해 가졌던 관점은 제퍼슨의 시각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저자이자, 제도권 기독교[institutional Christianity]를 거부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진정한 기독교인[a real Christian]이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홀덴은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을 골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기독 성경[The American Christian Bible]’은 오늘날의 미국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이자, 이 문화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개인 주권에 입각한 국가 주권을 지향하는 문화와, 조작된 대중 문화 간에 벌어지는 오늘날의 충돌 양상은 지난 2천년 간 지속되어 온 충돌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기독주의[Christianity]’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북유럽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것이, 현 충돌의 근원적인 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no-man’s land]’을 주의깊에 보존하며, 격리된 상태를 지켜오던 북유럽인들은, 외부에서 온 어떠한 ‘조작된 대중들’이 휘두르는 무력 앞에서도 결코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적들은, 교활한 방식으로, 조작된 대중 문화를 북유럽에 침투시켰고, 그런 다음, ‘이 문화에 휩쓸려 버린 북유럽인들’로 구성된 ‘조작된 대중’을 이용하여, 그들 자신들의 문화를 스스로 파괴하도록 만드는 한편, 다른 북유럽인들, 말하자면,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수 백만 명에 이르는 북유럽인들에게 ‘조작된 북유럽 대중’의 강권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일처럼 보이겠지만, 이 동일한 전술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과적입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은, 개인 주권 문화로 길러진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개인 주권 문화로 길러진 사람들과 싸우도록 만든 전쟁이었습니다. 대중 조작자들이 “문화 융합으로 구가되는 풍요”라고 부르는 것은 ‘합성 약물’과 같은 것입니다. ; 이 약물은 모든 분별력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을 부추겨, ‘제정신이 아닌 행위들’에 쉽사리 뛰어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
수세기 전 교활한 방식으로 북유럽에 주입되었던 문화는 여전히 현재의 충돌 양상의 초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자들은, 당시에 주입되었던 것은 단지 종교였을 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실생활에 있어서 더 이상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위에 언급된 진술에 동의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 우리 말을 끝까지 들으십시오! 우리는 ‘종교’라는 ‘거짓된 카테고리’로 분류된 어떤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에 의한 대중 조작 문화는, 한편으로, 대량 살육과 고문과 공공장소에서의 화형이라는 ‘문화적 행위’의 단면을 띠면서,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그 또 다른 단면으로, 교회는 결혼을 “통제”했고, 신앙을 강요했으며, 아이들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이 자손을 갖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살해하고, 원치 않는 방식의 출산과 양육이 강요되는 가운데, 대중 조작 문화라는, 이 외부 문화가 지향하는 노선은, 북유럽인들에게 익숙한 개인 주권 문화와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며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외부 문화는, 북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용의 모습’을 띠고 있음이 밝혀졌고, 성공적으로 반대 기류가 조성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용의 모습’이 제대로 식별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단순히 이에 대한 ‘분별력의 씨앗’만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별적인 파괴자들이 이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땅’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여권을 소지해야만 했습니다. 할랜드[Harland]는, 외부 문화 주창자들에게 부여하는 통과 허가권이 된 여권을,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동전의 한 면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들어 있었고, 다른 한 면에는 ‘유랑 하자르인들(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의 처세술’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위해 북유럽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목사들은, 운좋게 동전을 던져서 좋은 면이 나오면 통과 허가권을 얻는 것이고, 아니면, 거부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와 똑같은 속임수가, 하루 종일, 그리고 매일 같이,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들에 대한 위헌적인[unconstitutional] 통제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양면 동전’에는, 두 단어를 이어 붙인, 다음 말이 쓰여 있기도 합니다. : 유대-기독주의[Judaeo-Christianity]
우리는 개인 주권 문화권에서 대소동을 벌여 온, 이 ‘양면 여권’을 대단히 주의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오기 전에, 이 유랑 하자르 민족[the Nomadic Khazar Nation]은 로마 제국 안에서 사소한 잡음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반대되는 문화들이 예수, 즉 “폭풍의 눈”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단지 이들이 한 쪽 문화권 ‘날씨 형성의 최전선’에 있었기에,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전체 폭풍우 체계’ 자체가 이 글의 중요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신’ 만들어 내기[INVENTING GOD]
지난 2천년에 걸친 역사를 한꺼번에 고찰하는 이점을 안고서 본다면, 당신들은 예수가 “단지 우연히” 유대인들[the Judeans] 사이에 태어나게 되었던 바로 그 땅이, ‘반대되는 두 문화 바람들’이 만난, 정확한 교차 지점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하자르인들이 로마 제국 안에서 사소한 마찰만을 불러 일으켰을지라도, 그들은 ‘조작된 대중 문화권 날씨 전선’ 형성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뚜렷하게 부각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지구 상의 어떤 다른 민족들 보다가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조작된 대중 문화가 만들어 낸 전형적인 사례에 부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지구상의 어떤 다른 민족들 보다가도 훨씬 노골적으로 이 문화를 옹호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도, 의도적으로, 자연에 반대되는 “신”을 만들어 내어[inventing a “god” who opposed Nature], ‘원시 문화[the primitive culture]’가 지향하는 중핵적인 방향성을 공식화해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하자르인들(오늘날 스스로 자신들을 소위 유태인들이라 지칭하는 자들)은 더 이상 그러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진 그들의 목표는, “자연을 눌러 이기는 승리[victory over nature]”이자, 자신들의 반-자연적인 “도덕률”[anti-Nature “morality”]의 옹호이며, 이러한 목표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에 의해 주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혹은 이러한 목표들이 그들이 지향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atheistic communism]’에 논리적으로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목표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잘 조화를 이루는 그들만의 행위 원칙들로서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신”을 옹호하는 대변인들에 따르자면,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신”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며, 그들이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조작하는 자들”로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자연과의 접촉[contact with Nature]’의 필요성도 거부합니다. 그들의 대변인들에 따르자면,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어떠한 ‘자연과의 접촉’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산해 낸 ‘젖과 꿀’로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는 그처럼 자연에 대한 완전한 ‘경외심 부족’과 ‘인식 부족’ 상태의 사람들을 양성해 왔고, 그들이 목표로 삼는 “자연을 눌러 이기는 승리[victory over nature]”라는 것은, 퇴보해 가는 곤충들이 “성취해 내고자 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성취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은 완전한 무지 상태 속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궁극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지점’ 너머로 전체 인간 종들이 퇴보해 나가도록 밀어 붙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문화적 폭풍우’가 형성되었을 때, 하자르인들의 문화와 대척점을 이루던 문화는 북유럽에 격리된 채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그리스인들이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이었다고는 하나, 대중 조작 문화 속에 양성된 자들을 통제해 나가려는 노력 속에, 그들은 이 문화와 타협해 왔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문명의 모범적인 예에 따라 설계된 13개의 도시국가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도시들이 바로 예수가 태어난 지역을 둘러싼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원래의 정신이 얼마간 퇴색되거나, 혼재적 성격을 띠었던 도시들, 또 특정의 색깔이나 경향이 더 가미된 도시들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조작된 대중 문화에 맞서는 대안적인 문화들이 이 지역에 전반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적 색상’을 감지해 내고, ‘가벼운 미풍’을 느끼고, 또 이 ‘가벼운 미풍’으로 인식되는 문화가 완전한 힘을 얻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시각화시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하자르인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예리한 분별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타협으로 상당히 약화되어 온 문화지만, 대중 조작 문화에 대한 대안 문화로서의 힌트가 될 수 있었던 ‘가벼운 바람들’이자, 개인 주권 문화와 같은 방향성을 띤 문화들은, 전체 자연의 큰 흐름이라는 맥락 아래 판별될 수 있었습니다. 이 ‘가벼운 문화적 바람들’은 자연을 지지하는 문화이자, 또 자연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정도가 미소하다고는 할지라도, 대중 조작 문화와는 전혀 다른 문화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제안들’은, 당시 지배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던 두 개의 다른 문화 세력들(이 때, 이 지역에 존재했던 두 가지 다른 문화 세력들은 모두 대중 조작 문화의 다른 형태들에 불과했습니다.)의 주창자들이 펼쳐내던 갖가지 ‘잔 기술들[squeeze play]’ 속에 둘러싸여 있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분별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하자르인들을 상대로 지배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공개적으로는 로마인들 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비밀리에는 이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the Judeans] 사이에 태어났던 예수는, 대개 로마인들에 맞서는 하자르인들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는 압력을 받았지만, 그는 양쪽 모두가 같은 문화적 방향성을 띤 채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양쪽 모두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대중 조작자들이 “비폭력[non-violence]”으로 해석하는 예수의 가르침들은, 사실 상당히 다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주창하고 실제로 행했던 정책은 둘 중 어느 편도 들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둘 모두 ‘대중 조작’이라는 동일한 방향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이러한 태도는 후에 에세네파[the group of Essenes]와의 접촉 시에도 마찬가지로 견지되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예수의 지지를 부탁하며, 그가 자신들의 특정 공동체에 함께 참여하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바로 이 때, 예수는 신속하면서도 완전하게, 그리고 또 철저하게, 그들을 떠나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은 자신이 그들 중의 하나가 되기를 요구하기에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와 더불어 당신들이 한 가지 더 이해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예수[Jesus]”라는 명칭은 사실상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엠마누엘[Emmanuel], 이수[Esu] 기타 등등의 이름으로 불렸지, 예수[Jesus]라고 불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는 바울[Paul]이 나중에 그리스 여행을 다녀 온 후, 이 마스터 스승에게 붙일 타이틀로서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역사에 대해서, 또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 당신들이 찬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너무나도 자주, 당신들은 거짓된 것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 1계명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건네는 첫 번째 계명이 “내 앞에 다른 신들을 갖지 말라”인 것은(‘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참조--역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삶, 그 자체의 정수로서, 그 분은, 경험의 시작 지점부터 경험의 끝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너머 영원에 이르기까지, 각자각자의 안에 살아 계시며, 그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입니다.--당신들이 어떤 명칭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숭배하지 않을 때, 그 때 비로소, 언어 조작자들에게 휘둘려 판단의 착오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수[Esu]는, 둘 중 어느 쪽에 대해서도, 어떠한 능동적이고 물리적인 조력을 건네는 일을 옹호하지 않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둘 중 어느 쪽에 대해서도, 어떠한 능동적이고 물리적인 반대를 행사하지도 않음을 의미했습니다.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이수는 유대인들의 문화에 대해서 큰 염려를 표했는데, 왜냐하면 하자르인들/유대인들[the Khazars/Judeans]이 형성해 왔던 문화는 대중 조작 문화이자, 말로서[in WORDS], 자연에 반대되는 “도덕률”[Nature-opposing “morality”]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화가 갖는 ‘공식화된 언어적 진술들’에 대해서, 이수는 ‘인간들의 말들’을 이용하여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약 3년간 이러한 일을 행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부추기는 말들, 바로 이 문화권의 특색이 가장 뚜렷하게 반영되는 말들을 했습니다. ; 그들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런 다음, “신”은 자신이 한 창조에 대해 “후회했다”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이에 반대되는 문화적 바람의 미풍을 느낄 수 있었던 자들, 바로 미풍에 따라 흐르는 자연의 옮은 방향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자들은, 이러한 진술이 분명코, 반-자연의 “신”[an anti-Nature “god”]을 떠받드는 “예언자들과 그들이 만든 법률”에서 주장되는 방향성을 띠고 있는 것임을 판별해 낼 수 있었고, 또 그 방향성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화를 지지하는 모든 옹호자들을 불가피한 파멸의 길로 이끌 것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원시 반-자연 문화[the primitive Nature-opposing culture]는 단순히 공고화된 형태를 띠고 있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이 문화는 하자르인들이 만든 복잡한 법률 체계를 통해, 또 말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자랑스레 지켜 왔다고 주장하는, 교활한 속임수의 역사 속의 무수한 행동 사례들을 통해, 대단히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수는 이들에 대항하여, 가장 단순한 방식의 말들로 설파하며, 이들과는 뚜렷이 대조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수가 말하는 주권
이수는 자연[Nature]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들판에서 백합의 옷을 입고 계신 ‘하나님[God]’이자, 가장 작은 참새 속에 깃들어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수는 예언자들과 율법들을 비판했으며, 창조물 바깥에 존재한다고 하는 하자르인들의 상상의 “신[god]”을 무시했습니다. 이수는 모든 것 안에 내재해 계신 다른 신(하나님)[God]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창조물들의 아버지[Father to His creations]’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수는 사람들이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아버지의 자녀들임[they were of the Father]’을 깨닫길 요구하는 메시지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율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그러한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하여 행동해도 되고, 그러한 문제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자신들 안에 내재해 계신 신성한 영혼(정령)[the Holy Spirit that was WITHIN them]’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하고, 투박하며,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로는, 결코 개인 주권에 대한 보다 명쾌한 언급이 제시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수는, 메시아를 찾던 대중들, 조작된 대중의 지도자이자 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에 대한 새로운 대변인을 찾고 있던 대중들, 바로 이들에 의해 형성된 ‘날씨 전선’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대중 조작 문화 가운데 한 가지인 로마 문화에 맞서 싸울 생각만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들의 문화는 로마 문화보다도 더 극단적인 대중 조작 문화였던 것입니다. 인간들의 언어는 이수가 말하고자 했던 중요한 어떤 것들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부적절했습니다.
그가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말하고 났을 때, 그는 언어만으로는 하나의 문화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 ‘쓰디 쓴 잔’을 받아 마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용감하게 이를 포기하고,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파멸로 이끌 수 밖에 없는 문화에 반대되는 문화(개인 주권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그는 ‘신성한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혹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곧 ‘자신 안에 내재해 계신 그 분’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여전히 ‘완전한 진술[full statement]’을 펼쳐 보일 수 있었는데,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언어’로[in the language of the REAL GOD]--‘자연의 신의 언어’로[in the language of Nature’s God]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간은 다되어 가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수는,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편을 이뤄 싸울 수 있는, 어떤 전투에 뛰어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가서 너희 외투를 팔아, 검을 사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수는 대중 조작자들이 세워둔 구체적인 법률들 가운데 어떠한 사항도 어기지 않았지만(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전체 문화를 늘 비판해 왔습니다.),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완전히 인식하는 상황에서, 이 대중 조작자들에 공개적으로 맞섰습니다. 그는 개인 주권을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자기 자신을 한 명의 개인의 위치에 둔 다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중 조작 문화들 가운데 가장 첨예한 대중 조작 문화를 상대로 의도적인 대결을 펼쳤던 것입니다. ‘예언가들과 그들의 율법’을 거부하는 자를 결코 관용하지 않는 문화이자, ‘내재해 계신 신성한 영혼[the Holy Spirit within]’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문화를 상대로 ‘결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일이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 속으로 일부러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상황들은, 공존할 수 없는 두 문화들 간의 운명적인 대립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황들이었습니다.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모습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두 문화들 간의 대립은, 영원한 문제이자, 모두의 생사가 달린 문제임을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두 문화들 간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고, 극단적인 대칭을 이루는 두 가지 방향성 가운데, 반드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임을 그는 ‘그러한 언어’로 주장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 저널이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제 2권으로 명명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하지만,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시리즈(총 8권 : 피닉스 저널 제 30-37권)와는 별도의 책(피닉스 저널 제 28권)으로 출간됨--역주) 이 저널은 ‘문화’에 관한 한, 그 어떠한 조작도 없이 진실에 대한 가르침만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내용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형제들’로부터 전해지는 가르침들입니다. 나아가, 이제쯤 당신들은, 왜 조작자들[the manipulators]이 진실 전달자들[the Truth-Bringers]의 입을 가로막는 일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정보는 조작자들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내용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오늘날 당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개개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국가, 즉 개인 주권이라는 기반 위에 건립된 국가임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조작자들은 당신들을 노예화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강제적 조치들을 아직 다 완수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달성하려는 목표를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들은 주권 국민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개개인들이지만, 그런 식으로 행동해 나갈 가능성은 거의 다 차단되었습니다. 반면, 중앙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단일 세계 질서[One World Order]’ 내의 부속품들과 같은 존재들로 전락해 가고 있으며, 이 일은, 그 배후의 조작자들에 의해 거의 ‘완성된 역사’로서 기술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인간들은 ‘11시’가 넘어서도 깨어날 수 있을 것이기에, 결코 너무 늦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우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조악하고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들로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부터가 수월찮은 일이며, 완전하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좀처럼 힘든 일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수는, ‘자연과 자연의 신의 우주적 언어’를 이용하여, 전체 인간 종들 모두를 상대로, 가장 의미심장하고, 가장 웅변적인 ‘진술’을 했던 것입니다.
하자르인들은 이수의 그러한 진술을 무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곧 그들은 단순히 이를 무시해 버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진술’의 의미를 지적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모조리 죽여 버리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로마인들 역시 그 진술의 의미를 알게 되어, 하자르 갱단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모두 제거해도 좋다는 ‘면허증’을 발급해 줬던 것입니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하자르 ‘도살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타르소의 사울(사도 바울)[Saul of Tarsus]은 이야기들을 거꾸로 왜곡시켜, 이를 오히려 하자르 대중 조작 문화를 지원하는 용도로 삼으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바울[Paul]이여. 허나, 아들이여, 오늘날 ‘테이블’ 위에 올려져야 할 것들을 정작 가지고 왔던 자가 바로 당신임을 알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지금 현재, 인간들로서 경험을 겪어 나가고 있는 대중들에게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형태, 모든 방식의 반박과 비난들이 당신 위로 쏟아질 것이고, 이는 당신을 더더욱 옭아 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당신도, 단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쏟아낼 비난의 융단 폭격의 가혹함으로 인하여, 속박감을 느끼는 상황을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평화로 인도하고, 또 그 속에 머무르게 만들어 줄 다른 상황들도 맞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가 이제는, 제각각, 경험의 역사 속에 저질러 온 오류들을 바로잡는 일에 임함에 있어, 능동적인 역할을 맡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몇몇은 또다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자들은 반드시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르인들이 만들어 냈던, 상상의 산물이자 원시의 “신[god]”은, 그들의 “원죄[sins]”를 용서해 주기에 앞서, 그 대가로, 가장 먼저 태어났고, 가장 훌륭한 자를, ‘피흘림의 희생물’로 요구한다고 주장되었습니다. 한편, 모든 사람들은, 이수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라고 했던 말을 다 들었었고, 이를 두고 많은 자들은, 이수가 자신이 하나의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이해해 온 터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은 이수가 바로 하자르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못박힘은, 상상의 신이 정해 둔 법률에 따라, 이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구원에 대한 대가로서, 일종의 희생에 해당하는 것임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한 송이 장미...?
이제 나는, 지금껏 내가 계속해서 ‘하자르[Khazar]’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에 당신들이 주목해 봐 주었으면 합니다.--그런데 이 표현은 사실상 이 글 안에서는 적절한 명칭이 아닙니다. 이수가 왔던 시기에, ‘하자르인들(정확히 이 명칭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유럽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당신들이 짚고 넘어가야 될 사항이 있다면, “하(카)자르[KHAZAR]”는 그 의미상, “가즈[gaz]” 혹은 “돌아다니다[to wander]”라는 뜻으로, 달리 말하자면, “유목민들[nomads]”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두고, ‘하자르인들’이라고 지칭하는, 그 첫 번째의 실제적인 언급은 “제카리아 렉터[Zacharia Rhector]”의 ‘시리아 연대기[Syrian chronicle]’에 등장하는 것으로, 시기적으로는 6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꾸만 ‘하자르’라고 할 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요? 나는 바로, 이 하자르인들의 “문화[culture]”가 이미 그들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지어 당신들이 “그리스도[Christ]”라고 부르거나 받아들이는 자가 오기 이전부터도, 그들의 이 “문화”는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의 문화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이 이야기 속의 ‘그들’이 뭐라고 불렸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들을 ‘가나안 사람들[Canaaites]--저주받은 카인의 후예들[descendents of Cai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부르면, 정작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에 혼선만이 생기기에, 다른 주제로 빗나가지 않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또한 당신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사람들은, 당신들의 교회에서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바리새인들[Pharisees]’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 기회에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다만, 당신들이 명확히 이해해야 될 부분이 있다면, 내가 ‘하자르인들[Khazars]’이라고 말할 때, 나는, 오늘날 스스로 자신들이 소위 “유태인들[Jews]”이라고 ‘자처하는[self-styled]’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이수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사울(바울)이 떠올린 아이디어는 그의 ‘정신(영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crucifying the spirit]’이었습니다. 니체[Nietzsche]는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니체의 저서, 1888년작.--역주)에서 바울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 “유태인 사제로서의 본능은, 역사를 향해, ‘그 동일한 전문가다운 범죄’를 한 번 더 수행하게 만들었다.--그는 단순히 기독교의 어제와 그보다 더 먼 과거의 유산을 파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기독교사’의 출발점을 만들어 냈다. 이 복음 전도사(바울, 타르소의 사울[Paul, Saul of Tarsus])가 증오 앞에 희생시키지 않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실상, 구세주의 모습 너머로, 그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십자가’ 위에 못박았던 셈이다.” (이수가 남긴) ‘정신’이라는 측면에 있어서[In spirit], 이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있습니다. 빌리 그레햄[Billy Graham]과 제리 팔웰[Jerry Falwell](그는, “나는 내가 시오니스트[Zionist]임을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자르/엘리트[KHAZAR/ELITIST]입니다.)과 같은 저명 인사들은, 오늘날의 조작된 대중들로 하여금, 그 위에 더 많은 못을 박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종한” 바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예수” 이야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그리스 각지에 교회 ‘분점들’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인들은, 이수가 남긴 ‘진술’이 갖는, 분명하고도 위엄있는 웅변의 가치를 알아 봤고, 또 이를 잘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소크라테스[Socrates]가 남긴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극적인 영향력[dramatic impact]’에 있어서도, ‘의미의 명확함’에 있어서도, 분명히 더 위대했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 일구어 왔던 ‘개인 주권 문화’를 새롭게 중흥시키고자 다짐했습니다. 그들 자신들의 문화의 씨앗을 새롭게 파종했던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두 가지 다른 이야기(해석)들 간에는 충돌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논의들, 반대편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들, 화해할 수 없는 자와 화해하려는 시도들, 이런 모든 양상들은 엄청난 수준의 언어 폭력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백 년이 지났을 때, 이미 백 개도 넘는 기독교 교파들이 생겨났고, 저마다가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 불렀습니다.
언어 폭력들은 교리의 명분을 얻어 내기 위한 준비 작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수용한다는 건, 대중 조작 문화를 수용하는 셈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Roman Emperor Constantine](274-337, 콘스탄티누스 1세--역주)은 “예수”에 대한 관점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 ‘충돌의 쓰레기장’ 속에서, ‘대중 조작의 잠재력[the potential for mass manipulation]’을 알아 봤습니다. (나는 여기서 잠깐만 내 역사담당 (자료검색) 업무를 맡고 있는 노라[Nora]에게 묻고 싶습니다.--내 설명들이 괜찮은 것 같습니까? 내가 사건들의 전후 관계를 나열함에 있어서, 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깊게 보조해 주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나 하톤은 큰 빚을 지고 있군요. 나는 당신들의 역사가 지루하고, 또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내용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만, 어쨌거나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A.D. 314년, 황제는, 저마다의 가르침들을 검토해 보기 위해서, 다양한 “기독교” 분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A.D. 325년, 이어지는 회의에서, 그는 ‘공인용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몇몇 교리들의 추종자들을 선발했습니다.--이는, 그들이 나머지 교파들을 흡수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통과권
기본적으로 “공인 기독교[official Christianity]”라는 것은, 한 로마 황제가, 유순하면서도, 교리를 이용하여 통제하기 쉬운 백성들을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적-그리스도 도살자[the anti-Christ butcher]’에 의해 꾸며지고, 완전히 거꾸로 왜곡된 예수 이야기에 바탕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 사이에 펼쳐지는, ‘생사가 걸린 대립’에 관한, ‘가장 웅변적인 진술’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수의 ‘뜻깊고도 웅변적인 진술’은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했던 것으로, 여전히 살아 남았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던 그 진술’에 대해서 잘 아는, “공인 기독교”의 사제들은, 이를 ‘여권’ 삼아, 북유럽, 개인 주권 문화가 지켜지는 땅에 진출할 때,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북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이 ‘극적인 진술’은, 자기 자신들의 문화를 지탱해 주는 것이자, 자신들이 비판하는 문화를 비판하는 것으로, 한 영웅적인 개인이, 자신들의 땅에서도 아닌 외국의 땅에서 이뤄낸 것이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는 ‘진술’이었습니다. 이 진술이 갖는 웅변성은 ‘개인적 영웅주의[individual heroism]’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는데, ‘개인적 영웅주의’는, 그것이 어느 땅에서 펼쳐지는 것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감탄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로마 사제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 ‘영웅’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때, 감히 아무런 무기도 없이 ‘용’(혹은, 이수가 공명정대하지 못한 하자르인들을 부를 때 쓴 표현인 ‘뱀’도 될 것입니다.)에 맞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뱀 혹은 용에 치명적인 대치를 이루는 ‘개인 주권’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준 그러한 영웅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때, 가공되지 않은 진솔한 예수의 이야기는 ‘여권’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통과권을 얻어 낸 다음, 이 사제들은 서서히, 이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에 입각한 기독주의를, 바울의 적-그리스도적 “기독주의”라는 혼동스러운 오물로 슬그머니 바꿔치기 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른 후엔, ‘원시 대중 조작 문화’ 전파를 위한 하자르의 공식화된 교리를 조금씩 조금씩 더 주입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북유럽인들은, 비록 개인 주권 문화 속에서 의도적으로 길러졌고, 또 그 문화를 위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들 자신들의 손으로, 수백만에 수백만을 더한 자신들의 동포들에 대한 학살행위들을 감행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은 소위 말하는, “유대-기독주의[JUDAEO-CHRISTIANITY]”가 “동전의 앞면”에 등장했을 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혼동스러운 사람들’ 사이의 ‘조작된 전투’는 너무나 많은 단면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해 내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 똑같은 전투는 서구 세계 전역에 걸쳐서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로 하여금 그 동일한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을 파멸시키도록 조장하고 있는 요인은, 지금도 여전히 그 똑같은 ‘양면 동전’인 것입니다. 대중 조작자들은 그들의 노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혼돈과 파괴를 조장하여, 이러한 상황이 계속 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 ‘혼동스러운 오물’이 건네진 후, 억지로 떠먹여지는 상황을 두고, 로마의 우두머리 조작자들에 대항했습니다. 교묘히 북유럽인들에게 주입되었던 이것, 이 도저히 ‘양립불가능한 외부적 요소’를 도처에서 토해 내려고 하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루터는,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칭 유태인들, 바로 문제의 근원이 되었던 자들의 ‘공식화된 원시적 교리[the formalized primitive dogma]’일 뿐만 아니라, 그 동일한 ‘기독교 동전’의 다른 한 쪽 면은 하자르인들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 자신들에게 ‘훌륭한 여권’으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큰 환멸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가톨릭 교회가 수행했었던, ‘이 새롭고도 영리한 속임수’에 대해,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부러운 눈으로 감탄해마지 않았었는데, 교회가 반대되는 문화권에 속한 자들을 제거할 때 썼던 이 방식은, 바로 유태인들 자신들의 대중 조작 방식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형상’대로 만들어 내었던 이 반-자연의 “신”[the anti-Nature “god”]을 다시금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말하자면, 유태인들은 가톨릭 교회 뒤를 따라다니면서, 가톨릭 교회가, 자부심 높고, 역량 있으며, 자연을 사랑하는 북유럽인들을 상대로 얻어낸 권력을 빼앗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북유럽인들이 “하자르의 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만듦으로써 그렇게 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하자르인들,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사자의 먹이’ 주위로 몰려들어 배를 채우는 재칼들[jackals]과도 같았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였고, 또 이렇게 뚜렷이 식별되는 행태를 가진 유태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개인과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길 원하는 ‘개인 (주권)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조작자들은 끊임없이 힘을 그러 모으고, 패거리를 만들어 당신들 위에 군림하고자 합니다.--하지만 당신들에게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은 최고의 ‘우두머리 조작자[head manipulator]’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결코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당신들로 하여금, 행동과 변화를 취할 시간을 벌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인간[MAN]’이 자신의 “이성[REASON]”을 되찾는 한, ‘그’는 모든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잃었던 건, 바로 ‘그 인간 개인[THAT INDIVIDUAL MAN]’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리 될 것입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28권, “OPERATION SHANSTORM : Counter Attack From Behind The Feathered Curtain”, 제 12-14장, pp. 1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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