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들의 영국 지배사
제 6장, 기록 #2 하톤
1995년 5월 6일 토요일, 11:58 A.M. 8년 26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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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5 :
비밀 음모[the Occult Conspiracy]에 관한 역사적 고찰
by “DEG”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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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희생적” 출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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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도처에 존재하던 세파르딕 유태인들[Sephardics]이 마지막으로 은밀히 침입해 들어간 나라는 영국으로, 때는 A.D. 1077년이었다. 정확히 11년 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William, Duke of Normandy]이 야심차게도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하게 되었을 때, 사립의 유태계 은행가들은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 대담한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윌리엄은 색슨의 귀족이었던 헤롤드 왕[Saxon nobleman, King Harold]을 1066년, 결정적인 헤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물리쳤다. 이상하게도, 교황 알렉산더 2세[Pope Alexander II]로부터도 후원을 받았던 정복왕 윌리엄은 이후 새로운 형태의 영지내 집회였던 “대회의[Great Council]”를 개최했으며, 이를 통해 즉각적으로 대단히 무거운 과세 제도를 도입했다. 이 역동적이었던 새로운 노르만의 왕은 전 영국 땅의 주인이 되었고, 그 중 일부는 노르만의 지지자들과 자신을 후원해 준 유태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모든 영국의 땅 소유주들은 법적으로는 국왕의 땅의 임차인들에 불과하다. 유태계 역사학자인 S.W. 바론[S.W. Baron]은 이 특별한 유태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그들은 곧이어 “왕립 고리대금업자들”이 되었는데, 이들의 주요 역할은 정치적, 경제적 사업들에 대해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높은 이자율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후, 이 대출업자들은 그 중 일부를 이런 저런 명목으로 왕가의 재정적 지원을 위해 내놓아야 했다. 그렇지만, 많은 유태계 가문들은 오랫동안 화려한 저택에서 호화로운 복장으로 안락하게 살았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공적 업무에도 미쳤다... 이 유태인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왕가 주인들의 보호에만 배타적으로 의존한 채 살아갔다.”--그러나 마침내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누적된 불만은 1189-1190년간 폭동으로 이어졌다...”[하톤: 당신들 훌륭한 미국 시민들 가운데, 미국 땅의 3분의 1 이상이 실은 영국 왕가의 소유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오늘날까지도, 실제로 그렇습니다! 내가 한가지 첨언하자면, 그 왕가는 유태계 왕족으로부터 유래한 영국-이스라엘계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다채로운 삽화가 들어 있는 ‘유럽 왕족의 문장(紋章)학[Heraldry of the Royal Families of Europe]’(루다 & 맥클라건[Louda & Maclagan], 뉴욕, 1981년)이라는 책의 120-121페이지에도 나와 있듯이, 그 때 이후로 유럽 각국의 모든 왕과 여왕들은 윌리엄의 후손들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예외가 있다면, 독일 하노버 왕가의 겔픽 가문[the German Guelpic line of the Hanovers]이 해당된다. 하노버 왕가도 결혼을 통해 연결되었다.) : 영국, 스페인, 노르웨이, 덴마크, 리히텐슈타인,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스웨덴, 벨기에 그리고 모나코. 물론 기독 전통의 독일, 러시아, 프랑스, 스코틀랜드, 덴마크 왕가도 결혼(앞에 이야기했듯이)을 통해 맺어졌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대체로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이들 모든 왕족들은 그 조상을 추적해 올라가 보면, 모두 고대 이스라엘의 헤브루-이스라엘 13개 부족[13 Hebrew-Israelite Tribes of ancient Israel]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직 영국 왕족만이 다른 왕족들과의 빅딜을 통해, 자신들이 다비드 왕[King David]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며, 이들 모두에 대한 군주의 권한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이들 통치자들과 왕족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유태인들이 아니라는 점이다(내가 아는 바에 따르자면). 그렇지만, 사실상 모든 왕과 여왕들은 자신들의 통치 시기 동안 최고위급 참모들 또는 내각 구성원들로 세파르딕 또는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을 가졌던 것이다.
은행가들의 도시, “시티 오브 런던”
유태인들이 영국에 들어온 지 100년 남짓 지난 후인 A.D. 1189년, 런던에는 ‘더 시티[The City]’라고 불리는 지구가 형성되었는데, 이 곳은 옛 런던의 심장부에 위치한 사립 은행들의 집결지였다. 이 장방형의 지대(677 에이커)는 런던 시장[Lord Mayor]과 시 자치단체[Corporation]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양 기구는 이 곳에 자리잡은 십 여 개의 무역업자들의 본부도 감독했다. 나아가 ‘시티 오브 런던’은 결국에는 세계를 노예화시키려는 악마적인 음모의 핵심 중추가 되기도 했다.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난 후, 그곳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2,800마일 떨어진 곳으로, 팔레스타인 북부 해안 지방에 위치한 도시 에이커[Acre]에서 그랜드 케힐라[Grand Kehilla](유태 공동사회 대표자 명부이자 의회 조직--역주)의 막강한 권력자들로 구성된 300인 위원회[Council of 300][하톤: 존 콜먼[John Coleman]의 책, “음모가들의 위계조직, 300인 위원회 이야기”를 빠뜨리지 말기 바랍니다. 아직 못 읽어 봤다면, 당장 구해 보십시오! (WIR, 2433 N, 카슨가[Carson St.], 네바다주[NV] 89706)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연결됩니다!]의 모임이 개최되었으며, 여기에는 다른 하자르-아슈케나지 유태인들과 함께 ‘시티 오브 런던’의 대표들도 참석했다. 음모가들 사이의 극비 모임이었던 팍티오 세크레타 라운드 테이블[the Round Table of the Pactio Secreta](“신들의 유산[Legacy of The Gods]”, 로버트 차루[Robert Charroux], 뉴욕[NY], 버클리 메달리언 북스[Berkley Medallion Books], 1974년, pp.182-191) 회의를 주재한 자는 독일 호엔슈타우펜 황제[the Hohenstauffen Emperor of Germany]이자 예루살렘의 왕[King of Jerusalem]이었으며, 강력하고 살인적인 루시퍼계 리더였던 프레데릭 2세[Frederick II]였다. 당시 프레데릭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gold scepter as Holy Roman Emperor]과 시실리 왕[King of Sicily]의 지위도 보유하고 있었던 인물로, 로마 교황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 군주[tyrant]였다. 그의 황금빛 방패에 새겨진 문장(紋章)에는 피처럼 붉은 색의 부리와 치켜세운 발톱을 가진 악마적인 모양새의 검은 까마귀가 묘사되어 있었다.--검은 까마귀는 페르시아 미트라스 종파[Persian Cult of Mithras] 제 1계급의 오컬트적인 상징에 해당한다. 이 전설적인 인물은 그 때 당시, 독일 겔프[German Guelphs] 가문, 그리고 비엔나[Vienna], 피렌체[Florence], 제노아[Genoa]의 검은 귀족단[Black Nobility]의 주요 후원자였으며, 그들을 위해 하노버 가문[the House of Hanover]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 라운드 테이블 회의가 소집된 건 A.D. 1228년이었다. 오늘날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상을 뒤흔들었던 이 모임에는 프랑스 템플러 기사단[the French Order of Knights Templars], 튜튼 기사단[the Teutonic Kights], 독일 호스피텔러 기사단[the Germanic Order of Knights Hospitalers](300년 뒤 이 단체는 몰타 기사단[the Knights of Malta]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사라센 파타스[the Saracen Fatas], 에도미트-터키인들[the Edomite-Turks], 그리고 페르시아의 아사신(하사신) 동맹[the Order of Assassins(Hashashin)]도 참석했다. 당시 세상 곳곳으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든 이 끔찍하면서도 굳은 결심으로 가득 찼던 음모가들은 공동의 목표를 갖고서 하나로 뭉쳤다.--그들 자신들만의 메이슨적인 세계 “종교”[a Masonic universal “religion”]를 설립하는 것.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철저히 반대되는 것이었지만,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미트라교에 기반한[Mithraic-based] 극도로 억압적인 규율을 내세우며, 피를 부르는 종교재판을 일삼는 단체이기도 했다. 오컬트적인 단체들 전체를 아우르는 이 새로운 메이슨 조직[this new Masonic organization]은 단 한 명의 그랜드 마스터, 바로 프레데릭 2세에 의해 통제되었다.
pp.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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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기록 #1 하톤
1995년 5월 7일 일요일, 8:28 A.M. 8년 264일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6 :
[인용]
군주제는 신경쓰지 말 것[NEVER MIND THE MONARCHY] :
종교 재판의 연속
[하톤: 당신들 가운데, 우리가 그저 헛소리들, “말도 안 되는 언급들과 왕들”에 관한 이야기들만을 내놓으며, 단지 하나의 종족, 하나의 신조, 또는 하나의 집단만을 예외적으로 끄집어 내, 배타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믿고 싶은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가 여지껏 제시해 온 무수히도 많은 글들을 계속해서 읽어 왔다면, 우리는 오직 진실만을 제공하고 있으며,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분명히 입증해 줄 역사적 자료들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여기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그룹에 속해 있다고 느낀다면,--부디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주의깊게 살펴 보기 바랍니다. 당신은 스스로의 탄생을 좌우하고,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까? 당신이 이것 또는 저것이 되는데 있어서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었습니까? 이제야말로 ‘이단자 탄압[Inquisition]’이라는 인식의 틀을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불행히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단자 탄압”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멜 브룩스[Mel Brooks](영화감독, 작곡가, 배우로 활동하며 에미상, 그래미상, 아카데미상, 토니상을 다 받은 경력을 가진 인물--역주)가 헐리우드에서 해낸 일과도 연결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카톨릭 신자들도 “내”가 ‘이단자 탄압’을 했다고 공격합니다. 한편, 유태인들은 로마 카톨릭과 (우리) 메신저들을 모두 비난합니다. 그렇지만 이건 역사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제시하는 것들은, 적어도 오늘날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역사는 아닙니다!]
에이커[Acre]에서 개최된 ‘왕들의 컨퍼런스’에 참석한 유태인들에게 다시 눈을 돌리자면, 이 일로 인해, 당시 카톨릭 교회는 전 유럽의 모든 유태인들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Pope Innocent III]는 공식 포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유태인들은 (이유 불문하고) 제거되지 않는다면,, 사과 안에 든 벌레나 심장 속에 든 뱀 만큼이나 우리에게 위험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쥐처럼 우리를 갉아 먹고 있으며, 뱀과 같은 악취를 풍기고 있다. 우리 가슴 속의 불길이 이들을 제거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이들에게 집어 삼켜진다면, 그건 엄청난 수치가 될 것이다.” 부패한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단자들[heretics]”)에 대해, 전 유럽에 걸친 종교재판[Inquisition]을 통해, 대량 학살과 고문을 허락했던 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치고는 아주 흥미로운 언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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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5년,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the Fourth Lateran Council]에서는 당시 유태인들에 의해 통제되던 무역 카르텔에 대해,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의 조치들이 채택되었다.
...... 헝가리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도 점차 자신들에게 불리한 국면을 맞게 되었다. 쾨스틀러[Koestler]에 따르자면, 고대 로마 시대 이래로 소수의 “진짜 유태인들”이 살고 있던 훈족(마자르족)[the Huns(Magyars)]의 땅에서, “A.D. 1222년 엔드레(앤드류)[Endre(Andrew)] 왕에 의해 “골든 불[Golden Bull]”(헝가리판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1215년 영국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을 위해 왕에게 강요하여 받은 법률 문서--역주)에 해당--저자주)이 공포되었는데, 이에 따르자면, 유태인들은 조폐업, 세금 징수업, 왕립 소금 독점업에 참여하는 일이 금지되었다.--이는 바로 이 칙령이 있기 전까지, 무수히도 많은 유태인들이 이러한 주요 직책들을 맡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러한 위치들을 더 많이 차지해 나갔다. 당시 엔드레 왕의 왕실 재정 관리인은 챔벌레인 테카 백작[Chamberlain Count Teka]이었는데, 그는 부유한 지주 출신으로 하자르계 유태인이었다...”
...... 한편, A.H.M. 람세이 대령[A.H.M. Ramsay]이 쓴 ‘이름없는 전쟁[The Nameless War]’(런던, 1952년)에 나와 있듯이, A.D. 1255년, 영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더 큰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영국 링컨[Lincoln]시에서 휴그[Hugh]라는 이름의 어린 크리스챤 소년이 유태인들의 소름끼치는 의식에 따라 살해[ritual murder]된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년은 온 몸이 절단되고 피가 모두 빠져나간 채, 냉담하게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고이 희생[Goyim sacrifice] 의식’에 따른 것으로, 역사 기록에 따르자면, 탈무드를 준수하는 랍비들에 의해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여러 다른 나라에서 행해져 온 것과도 유사한 일이었지만, 영국의 유태인들에게는 그들의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하톤: 나는 여기서 ‘누군가’에 의해 “오늘날”에도 행해지고 있는 이 “의식에 따른 살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참견할까 합니다. 당신들은 아이가 실종되고 나중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살해 또는 범죄 현장에 관한 완전한 정보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버려진” 시체에 관한 모든 뉴스들이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경찰은 얼마나 잔인하게 살해되었는지에 관한 완전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어떤 조직 또는 개인에 의한 “의식에 따른 살해”는 사탄주의에 기반한 것으로, “사건을 책임진 자들”도 경우에 따라 일련의 ‘교파’에 소속되어 있을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감히 이러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알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살해에 사용된 방식이나 단서 같은 것들에 관한 소식을 듣지는 못할 것인데, 대개 범죄자를 추적하는 주요 단서들은 비밀로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러한 사건들을 다룸에 있어서 당신들, ‘대중들을 통제하기 위한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국왕 헨리 3세[King Henry III]가 직접 소집한 센세이셔널한 재판에서, 총 18명의 범죄자들이 기소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이들은 끔찍한 범죄에 대한 대가로 사형되었다. 물론 그들 모두는 유태인들이었다. 만약 이것이 영국에 의한 유태인들에 대한 일종의 차별로 여겨진다면, “의식에 따른 살해와 관련된” 주목할만한 122건(“피의 기소[Blood Accusations]”)의 재판에 대해 나와 있는, 유태 백과사전 1905년판을 읽어보면 그러한 생각이 곧 바뀔 것이다. [하톤: 빙산의 일각!] 그 중 39건은 19세기 “유럽 전역에 걸쳐”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이후 1275년, 영국에서는 “유태인에 관한 법[Statute of Jewry]”이 통과되었는데, 이 법은 이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거주를 나라의 특정 지역에 한정시키고, 그들에게 악명높은 고리대금업도 금지시키는 내용이었다. 또한 유태인들에게는 식별용의 노란색 배지[yellow badge]를 다는 일도 강요되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오래된 방식들을 고집했고, 이는 영국의 관습과 법률에는 너무나도 어울릴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A.D. 1287년, 그들은 모든 권한과 특권을 박탈당했으며, 3년 후, 에드워드 왕[King Edward]은 유태인들을 영국 땅에서 모조리 추방하는 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에브라임[Ephraim](요셉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 가문의 선조, ‘유태인들의 계보’ 참조--역주)과 마나셰[Manasseh](유다 왕국의 왕--역주) 부족의 영국계 후손들이 갖게 된 이 최후의 분노에 직면하여, 유태인들은 A.D. 1290년 영국을 떠났으며, 약 400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다수의 유태인들이 한꺼번에 영국으로 되돌아 오지는 못했다. 그 해 10월, 16,000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배를 타고,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 독일, 스페인 등지로 흘러 들어 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종교를 가진 자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러나 1298년,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을 다시 내쫓았다. 독일인들은 15년 전에도 일련의 문제에 따른 유태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그들을 내쫓은 적이 있었다.
[하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에서 일어났던 것(‘1조달러짜리 거짓말, 홀로코스트’ 참조--역주)과 동일한 일로, 독일인들은 이들 하자르계 지크들(유태인들)[Khazarian Zhiks]로부터 자기 나라를 되찾으려고 했습니다. 독자들이여, 당신들이 어떤 것을 믿도록 유도되어 왔든지 간에, ‘사실’을 말하자면, 이 집단적 유태인들[the Ghetto Jews]은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해 한 일이, 합리적이었다거나, 옳았다거나 하는 류의 문제가 아닙니다.--이건 아주 단순히 ‘역사상의 진실[the TRUTH of the times]’일 뿐인 것입니다. 자칭 “유태인들”이라 불리는 집단이 평화적으로 독일로부터 떠나갈 수 있도록 충분한 통로와 교통수단은 제공되었습니다. 당신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그 때 당시, 사실상 어떠한 “인종적[RACE]” 고려도 없었다는 것입니다.--단순히 “찬탈자들에 대한 그룹 규정[grouping of usurpers]”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당신들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인종”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오직 모두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가하려는 ‘특정 “그룹”의 의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몇 년 뒤, 프랑스 전제 군주였던 필립 르 벨(공정왕)[Philip le Bel(The Fair)]은, “유태계 의사들이 저지르는 살인적인 행태에 관한 악명높은 스캔들”이 발생한 이후, 당시 “무한한 이타심”의 표본으로 이름이 높았던 프랑스 카톨릭의 수장에게, 이들 유태인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그리고 지금이 유태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땅과 부를 몰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보았다. 아서 쾨스틀러[Arthur Koestler]가 이야기한 바대로, “1306년 6월 21일, 필립 르 벨은 특정일에 자신의 왕국 내의 모든 유태인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하는 비밀 교서에 서명했다. 7월 22일 거국적인 유태인 체포는 감행되었고, 몇 주 뒤에 이들은 추방되었다. 이들은 왕의 통치 영역 바깥의 프랑스 지방, 말하자면, 프로방스[Provence], 브루군디[Burgundy], 아키탄느[Aquitane], 기타 몇몇 봉건 영주의 영지 등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4세기 말엽, 프랑스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사실상의 유덴라인(유태인 청정지역)[Judenrein(clean of Jews)]이 되었다. 그러나 여러 세기가 지난 후인 1789년(프랑스 혁명--역주), 이들 유태인들의 후손들은 프랑스 왕가와 교회, 양쪽 모두에 대해 고스란히 보복했다.
pp.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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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역사는 반복되는가?)
젠타일들[Gentile](유태인이 아닌 자들--역주)이 행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유태 랍비들은 어둠의 게토[ghettos]에 모여, 분주히 복수를 위한 음모를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A.D. 1347년, 흑사병으로 인해 전체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들을 통해, 그들은 재기를 노렸던 것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자면, 당시 아시아로부터 투르게스탄[Turkestan]을 경유하여 지중해의 여러 항구에 도착한 많은 배들에는 알려지지 않은 쥐떼들이 들어 있었다. 이 쥐들에게는 파스퇴렐라 페스틱스 바실리[Pasteurella pestix bacilli](흑사병의 원인균--역주)라 불리는 치명적인 병원균을 보유한 벼룩이 있었다.
[하톤: 이 부분을 놓치지 마십시오! 미국과 서유럽 몇몇 지방은 이미 경고 단계에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설치류의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올해 홍수와 (설치류들에) 충분한 영양공급으로 인해 그 경향이 보다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학살과 죽음의 장치 속에 놓여 있습니다. 부디 우리가 쓴 책들을 주의깊게 살펴 보십시오. 당신들을 향하고 있는 이 질병을 적절히 막아낼 만한 항생제도 부족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다량으로 확보해야만 합니다. 다르마여, 우리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은 생존 또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비스트(짐승)”의 계획은 적절한 타이밍이 되자마자, 이것을 당신들에게 ‘쏟아 붓는 것’입니다. 이 질병은 심각한 상황을 만들게 될 것이고, 설치류의 분포가 높은 지역에서 갑자기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들은 ‘멸종동물 보호법에 따른 조치’라는 미명 아래 행해질 것입니다. 학살을 위한 원인균들은 이미 퍼져 있습니다.]
끔찍한 질병이 유럽 대륙 도처에 퍼져 나갔으며, 지나는 데마다 사람들의 시체 더미만 쌓여 갔다. 그런데 이 배들에는 저마다 유태인들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내, 흑사병에 대한 비난은 유태인들에게 돌려졌으며, 심지어 유태인들이 질병에 감염된 시체를 모두가 마시는 우물에 던져 넣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사람들의 분노는 “유럽 전역에 걸쳐, 유태인들에 대한 집단 화형”으로 이어졌다.
[하톤: 당신들이 마시는 물도 곧 감염될 것입니다! 염소 살균으로 죽지 않는 크립토스포리듐 기생충[cryptosporidium parasite]이, 퍼뜨리려는 병원균의 선별된 매개체로 사용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유태인들”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 이건 단순히 ‘유태인과 고이간의 문제[Jewish-Goyim problem]’ 이상의 문제입니다. 놀랄만큼 넓게 퍼져나간 “미스터리한 질병”은 단지 “업데이트”되고 “업그레이드”된 폐렴일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에게 다가올 일을 어떻게 예방할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신들이 얼마나 쉽게 속는 지에 대한 “테스트”이자, 진짜 질병이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을 때, 어떻게 사람들을 죽일 수 있을 지에 대한 “테스트”였던 것입니다!]
화형을 피하기 위해, 많은 유태인들은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산 채로 불태워지는 것보다는 나은 방편이었다.” 이후, 쾨스틀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이어갔다. : “흑사병의 뒤를 이어 프랑스, 독일 등지의 오래된 유태인 커뮤니티가 사실상 제거되고 난 후, 서유럽은 약 2세기간 유덴라인[Judenrein](유태인 청정지역)이 되었으며, 오직 소수의 집단거주지만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스페인을 제외하고...”
p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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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추방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유태인 추방, 그리고 흑사병에 따른 고난과 이에 수반된 유태인들에 대한 기소의 뒤를 이어, 이 명백하게 성가신 존재인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혐오스러운 전통으로 인해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쫓겨났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뿐만 아니라(앞서 언급한 것처럼--저자)(생략된 단락에서 저자는 스페인(1492년), 포르투갈(1497년)에서 각각 유태인들이 추방되었다고 서술--역주), 헝가리(1360년), 슬로바키아(1380년), 프랑스(1394년 “영구적으로”), 오스트리아(1420년), 리투아니아 & 피렌체(1495년), 프러시아(1510년) 그리고 바바리아(1551년)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하톤: 독자들이여, 이건 당신들이 가서 확인해 볼 수 있는 팩트들[facts]입니다! 무작정 부인하기를 멈추고, 가서 역사를 공부해 보십시오--이러한 사실들이 영원히 묻혀버리기 전에. 우리가 현재 다루고 있는 이 역사적 데이터들을 포함하고 있는 책들은 지금 모든 도서관과 서고에서 제거되고 있는 중입니다.]
유태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는 운이 좋은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유태인 피난민들은 폴란드와 네덜란드[Holland]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애시 당초 이 나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인지는--그리고 그 곳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인지는-- 내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어쨌거나, 그들의 불온한 관습에 따라, 몇몇 용감하고 굳은 결심을 가진 유태인들, 마라노스들[Marranos](신분을 숨긴 비밀 유태인들--저자)은 예전처럼(로마 카톨릭을 따라 기생충과 같이 잠입--저자) 또다시 비밀리에 프랑스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그들의 기괴한 행동에 따라 이내 국왕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다시 한 번 프랑스 국민들의 무서운 분노를 샀다.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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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기록 #2 하톤
1995년 5월 7일 일요일, 1:57 P.M. 8년 264일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7 :
[인용]
이름없는 전쟁
한편, 암스텔담[Amsterdam]에 살던 유태인들은 영국 귀족계급의 전복을 위한 복잡한 음모를 거의 완성시켜 나가던 중이었다. A.H.M 람세이 장군[Captain A.H.M Ramsay]은 자신의 책, “이름없는 전쟁[The Nameless War]”에서, 대단한 공을 들여, 그 구체적인 사항들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원한을 품은 유태인들이 이 엄청난 음모를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수족[their cat’s paw]’으로 선택했던 인물이 바로 야심차고도 무도덕적[amoral]이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청교도 혁명을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한 인물--역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 목적 달성을 위해 크롬웰에게 거의 무한정의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충분한 자금력을 보유했던 크롬웰은 1640년부터 조장하기 시작했던 영국 내전(1642-1651간 이어진 영국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내전--역주)을 이끌 수 있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출혈과 국력 쇠퇴를 야기했던 이 내전을 통해, 국왕 찰스 1세[King Charles I]는 처형되었고, 크롬웰 자신은 영국의 사실상의 독재자(수많은 유태인 참모와 관료들이 그의 주위에 있었다.)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1664년, 유태인들의 대규모 영국 복귀[mass return of the Jews]를 이끌어 냈다.--이에 뒤따라 즉각적으로 또 한차례의 흑사병[bubonic plague]이 영국을 강타했다. 암스텔담과 기타 여러 곳에서 온 선박들에 ‘우연히’ 실려 있던 쥐떼들로 인한 것이었다. 또한 1666년에는 런던 대화재 사건[the Great Fire of London]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태인들과 그들을 뒤따르는 사건들의 쇄도는, 보다 일찍이 스페인에서 일어났던 일과 마찬가지로, 결국 오랫동안 계획되어 온 음모에 따라, 영국을 집어 삼키게 되었다.
[하톤: 이어지는 단락에 보다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유태인들은 또 다시, 자신들의 오래된 본부인 ‘시티 오브 런던’을 구동시켰으며, 이 곳으로부터 수 천 명에 이르는 중무장한 깡패들--“작전 수행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들의 유일한 목표는 영국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해서, 자신들 앞에 비굴한 복종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 부패한 세파르딕-아슈케나지 유태인들[Sephardic-Ashkenazim Jews]은 유서깊은 길드 홀[Guild Hall](시티 오브 런던의 중심에 자리잡은 건물로 시장 선거, 시의회 등이 열리며 각종 박물관도 위치--역주)에 9피트가 넘는 이교도의 우상[pagan idol]을 묘사한 거대한 황금 동상도 세우게 되었다. 활과 화살통 그리고 창을 보유한 이 동상은 두렵고 무서운 몽골 또는 하자르계 전사[Mongol or Khazar-type warrior]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이것은 전제적인 형상을 띤 야벳[Japheth]의 후손이자, 요한 계시록 20장 8절에서 경고한, 곡[GOG]의 뻔뻔스러운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시티 오브 런던에는 유태인들의 거점 시나고그(베트 하티플라[Beth Hattiflah])가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올드 베일리[Old Bailey](영국 형사 재판소--역주)(중세시대 성채로 쓰이던 건물--저자), 영국 주식 거래소[the British Stock Exchange], 유태인들이 자금을 대고 통제하는 영국 은행[Bank of England], 영국 법조 학원들[the Inns of Court], 런던 보험 시장[Lloyd’s of London], 여론을 선도하는 다양한 신문사들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소수이지만 극도로 탐욕스럽고,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유태계 은행가 가문들의 그룹에 의해 오랫동안 통제되어 온, 시티 오브 런던은 오늘날에 와서는 ‘유태인들의 세계 초국가[Jewish World Superstate]’ 그리고 ‘미슈푸카(미슈푸카는 악의적 유태인들을 지칭하는 또 다른 명칭--역주) 국제 범죄 패밀리[THE MISHPUCKA INTERNATIONAL CRIME FAMILY]’의 사실상의 핵심 중추[nerve center]가 되었다. 이들 탐욕의 범죄 집단[criminal lustmenschen]은 수 세기에 걸쳐 세계 도처에서 끝없이 계속된 전쟁과 혁명을 주도해 온 실질적인 ‘보이지 않는 손[Hidden Hand]’이자, 많은 주요 은행들의 파산과 주식 시장 붕괴의 핵심적인 선동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또한 일종의 전염병처럼 오랫동안 서구 세계에서 계속되어 온 대부분의 경제 공황을 계획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교활한 대리인들은 오랫동안 세계 불법 마약 거래의 비밀 통제자들이었으며, 백인, 흑인 노예 무역을 마찬가지로 통제하기도 했다. 나아가 지난 반세기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보다 위험하고 범죄적인 ‘기업 습격대[corporate raiders]’는 마치 독수리처럼 비즈니스 세계에 내려 앉아 왔는데, 이들 대부분 역시 유태인들과 동류의 무리들[their tribes]이었다. 분명코, 유태인들은 아주 능수능란하고도 전문적으로,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들의 수많은 국내 문제들을 잘도 조작해 왔다.--자신들의 “끔찍한 금권[terrible power of the purse]”을 통하여. 전술한 모든 내용들은 물론, 문서화된 기록으로 잘 남아 있다.
[하톤: 아직도 누가 (오늘날의) 16인 또는 17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고 있습니까? 아,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는 다른 분파들[factions]도 존재합니다.(‘시오니스트, 볼셰비키 그리고 록펠러 카르텔’ 참조--역주)--이러한 사실은 “나머지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 기회를 제공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제각각) 각국의 부를 소유하고 통제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사탄 의식을 따르는 것은 아닌데, 여기 큰 차이점이 놓여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13인 위원회 또는 16인 위원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미국 시스템의 붕괴를 원하는 반-애국주의자들은 아닌 것입니다. 다만, 그들 모두는 단순히 이 시스템에 대한 통제와 권력을 얻길 바라는 것입니다.]
p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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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기록 #2 하톤
1995년 5월 10일 수요일, 10:06 A.M. 8년 267일
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11 :
[인용]
섹션 II[Section II]
메이슨(건축 석공)[Architectural Maso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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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타 웹스터[Nesta Webster](1876-1960, 음모론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긴 영국 여성 작가--역주)에 따르자면, 영국에 처음으로 메이슨들이 자리잡게 된 건, A.D. 926년, 유명한 요크 센터[York Center]가 생기면서부터였으며, 주로 컬데스[Culdees](?--저자)에 의해 운영되었던 이 기관을 통해 영국내 메이슨 활동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컬데스는 이와 함께, 스코틀랜드, 킬위닝[Kilwinning], 멜로즈[Melrose], 에버딘[Aberdeen]에 있던 메이슨 학교[the Masonic Collegia]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존 야커[John Yarker]의 책, ‘불가사의한 학교들[The Arcane Schools]’에 따르자면). 중세시대 프랑스에 있던 메이슨(노동 석공)[working stone masons] 동업자 조합은 “꽁파뇨아쥬(동업조합)[Compagnonnages]”로 불렸으며, 독일에 있던 메이슨들의 조합은 “슈타인메첸(석공들)[Steinmetzen]”으로 불렸다. 프랑스 단체의 본부는 파리에 있었으며, 독일에서는 나중에 석공들 가운데서도 고딕 건축업자들[Gothic architectural builders]의 본부가 스트라스부르그에 생겼다.(이 단체는 1498년 막시밀리언 황제에 의해 마침내 승인되었다.)
이와 같은 초창기 유럽내 메이슨들의 단체는 그 활동에 있어서 어떤 부패한 면모나 불길한 양상을 띠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날의 프리메이슨[Freemasonry]처럼, 그들도 친절하고 인간적인 면모 너머로, 어떤 정부 전복적 성격을 가진 비밀 움직임들을 가졌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적인 윤곽 속에서,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사변적이고, 철학적 성격의 메이슨들, 보다 나은 표현으로는 ‘프리메이슨[Freemasonry]’으로 알려진 자들이다. 어쩌면 당신이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15세기, 영국에서 헨리 6세[King Henry VI]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 의회 법안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었던 건 바로 이 ‘프리메이슨들’이었다. 정확히 1세기 후, 엘리자베스 여왕[Queen Elizabeth]은(우리가 이어서 곧 보게 되겠지만) 요크[York]에서 매년 열렸던 그랜드 롯지 모임[the Annual Grand Lodge meeting]을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바꿨다.
정보기관 개관[INTELLIGENCE SURVEY]
영국 정보기관 약사 및 프리메이슨과의 상호 연계성
여왕 폐하의 비밀 정보기관[Her Majesty’s Secret Service]의 숨겨진 역사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정보기관 그룹[Intelligence Circles]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 연원은 400년도 넘게 거슬러 올라간 약 A.D. 1570년경에 이른다. 처음에는 단 두 사람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은 프랜시스 웰싱햄 경[Sir Francis Walsingham](1532-1590)으로 그는 진취적인 영국 프리메이슨[English Freemason]이자, 당시 (튜더 왕조[the House of Tudor]) 엘리자베스 1세 여왕[Queen Elizabeth I] 휘하의 양대 국무장관[Joint Secretary of State] 중 한 사람이었다. 여왕의 스파이 업무 최고 책임자로서, 웰싱햄은 정교한 스파이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그 때 당시 꾸몄던 불행한 음모는 궁극적으로 (스튜어트 왕조[the House of Stuart])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을 덫에 걸려들게 만들었고, 1587년 결국 그녀의 참수로 이어졌다. 메리 여왕은 그 무렵 카톨릭을 배후로 한 음모를 꾸며,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자기 자신이 영국 여왕으로 등극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메리는, 진정 독사 같은 인물이자 야심차고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없었으며, 동성연애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왕[King James VI]의 어머니였다. 제임스 6세는 로마와 공모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엘리자베스 여왕과는 연대를 맺기도 했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처형이 있을 당시, 조용히 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영국에서 있었던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둘러싼 모든 음모와 간계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메리는 당시 영국 여왕을 둘러싸고 있던 메이슨들이 꾸민 영리한 장치[clever set-up]에 걸려 들었던 불행한 희생자였다는 주장도 제기 된다. CIA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Allen Dulles]가 쓴 ‘정보기관의 술수[The Craft of Intelligence](1963년)’라는 책에 보면, 이러한 의혹을 이내 확인해 볼 수 있다. 덜레스의 서술에 따르자면, 메리는 실로, 웰싱햄의 교활한 음모 가운데 하나에 “성공적으로 걸려 들었던” 것이다. “웰싱햄 덕택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영국 여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바빙턴[Babington]의 어리석고도 엉성한 음모는, 엉뚱한 결말을 맺게 되었고, 결국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메리의 처형을 명하는 문서에 서명할 구실만을 만들어 주었다.” 메리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위치한 스타 체임버 법정[Star Chamber Court](15세기 후반부터 1641년까지 운영되었던 법원으로 일반 법원에서 다루기에는 부담이 되는 거물급 인사들의 재판을 담당--역주)에 기소되었으며, “엘리자베스의 암살 음모를 입증하는, 웰싱햄의 손으로 쓴, 많은 편지 카피본들이 주된 증거가 되어 결국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 악명 높았던 스타 체임버는, 헨리 7세가 봉건시대 군주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설립했던 법정으로, 그 이전에는 유태인들과 관련된 각종 권리 증서나 “문서들[starres]”(starr는 헤브루어로 ‘document’를 의미--역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장소로 쓰인 곳이었다. 스타 체임버는 튜더 왕조시대 형사 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배심원들의 결정과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하톤: 당신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게 되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들 모두가 이 이야기를 헐리우드 영화에 나온 것 정도로 생각할 것이라는 데에 내기를 걸까 합니다. 그렇지만, 헐리우드[Hollywood]가 얼마나 영리하게 잘못된 정보들을 유효한 사실들로 포장해서 당신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지에 대해 늘 주의하기 바랍니다!]
웰싱햄과 함께 영국 정보기관을 세운 또 한 명의 공동 창립자는 윌리엄 세실(버레이 경) 1대 남작[William Cecil(Lord Burleigh), 1st Baron](1520-1598)으로, 그는 28세에 이미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거머쥐었던 인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최고 참모[chief adviser]가 되어, 이후 약 40년 동안 그녀를 보좌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재임시절(1542-1567)에는 로마 카톨릭을 따랐었다. 그러나 이후 1570년,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 정책의 교활한 기안자이자 주의깊은 지휘자가 되었으며, 메리 여왕에 대한 직접적인 음모를 꾸미기 위해 스파이 조직을 구성했으며, 심지어 훗날 그녀가 처형되기 전부터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실질적인 책임자로 간주되었다. 당신들도 기억하겠지만, 영국 프리메이슨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토마스 색빌[Thomas Sackville](1536-1608, 영국 시인, 정치가--역주)은, 메리가 잔인하게 참수되기 직전에, 그녀의 사형을 발표하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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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톤: 여러 사건들을 둘러싼 오래된 동맹 단체들간의 훼방과 “연합[connection]”이 있어 왔으며, 바로 이들 오래된 동맹 단체들로부터 ‘신 세계’에 대한 통치권[the throne], 곧 ‘디 오더[the Order]’(신 세계 질서)를 지향하는 커넥션들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하나의 ‘신 세계 질서[a New World Order]’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실제로 ‘신 세계 질서[New World ORDER]’(신 세계의 질서[ORDER of the New World]--U.N. 빌딩을 본부로 하여 “뉴욕”에 여러 건물들에 두고 있는 신 세계 질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요크 오더[the YORK ORDER]에 따르자면, 이건 ‘뉴 월드 오더’ 또는 ‘뉴-요크 오더[The New World or New York ORDER]’겠지만, 다른 예를 들자면, 이건 ‘장미 십자가회의 오더[ORDER of the Rosie Cross]’ 또는 ‘템플 기사단의 오더[ORDER of the Knights Templar]’, 기타 여러 단체들의 ‘오더’도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들은, “정부”의 활동이 다양한 기관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브루킹스 연구소[The Brookings Institute](여타 싱크 탱크나 연구 기관들)는 영국 여왕의 정보기관인 MI-6의 활동을 숨겨주는 기관으로, 각종 마인드 컨트롤 프로젝트나 컬트 단체들(교회나 사이비 집단들)의 활동에 대한 위장막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 및 철학 대학[the University of Science and Philosophy]’과 같은 단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학 및 철학 대학’은 영국 “러셀[Russell]” 가문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기관이자, 라오[Lao]와 관련된 왕실 계보와도 연계되어 있습니다(빛, 물질 등을 연구한 월터 러셀[Walter Russell]은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인 라오를 만난 이후 몰락. 러셀에 대해서는 ‘빛에 대하여’, ‘물질의 구성’ 참조--역주). 라오의 가계는 영국 왕립 블루 북[the Royal Blue Book](런던내 주소별 인명사전--역주)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불행히도, 다양한 기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러한 사실들을 다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약화되지는 않습니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반-중상 동맹(ADL)[Anti-Defamation League](이 역시 영국 정보기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으며, 브나이 브릿츠[B’nai B’rith](유태인 문화교류 촉진협회--역주)는 특히 주목할만한 기관에 해당합니다.)과 함께, 런던 타비스톡 연구소[the Tavistock Institute of London]와 영국 정보기관의 미국내 주요 지부 역할을 하는 기관들입니다.(브루킹스 연구소가 미국내 본부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단체들은 지금 우리가 전하는 이 신성한/그리스도적인 진실[Godly/Christly truth]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반대 여론과 반대 움직임을 조성할만한 기관들인 것입니다. 이제 다음을 상기해 보도록 합시다. : 당신은 이러한 조직들의 통제 하에서, 현재 진행 중인 ‘오더[ORDER]’에 당신들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를 알게 되면, 그리고 당신들이 얼마나 손쉽게 “눈가림[hoodwinked]”(이것은 유효한 메이슨들의 용어[a valid Masonic term]입니다.)을 당할 수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면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당신들이 완전히 속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될 가능성도 높다고 봅니다. 만약 당신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진실(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폭로--역주)’에 대해서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높은 빛의 진실[Highest Lighted Truth]’에 입각한 것이라면, 누군가가 당신의 일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누가 한 일인지에 대해 널리 알려준다면 당신은 대단히 기쁘지 않겠습니까? 흥미로운 일이지요! 부디 우리가 “비난 모드[bashing mode]”에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단지 문서화된 자료들과 공공이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을 제시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밝혀진 사실’을 다시 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웰싱햄이 주도했던 메이슨주의에 기반한 영국 스파이 기구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신규 요원 채용과 관련하여, 외교관계위원회(CFR)의 위원이자 전 OSS의 관리였던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를 졸업한 가장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주 대상이었으며, 웰싱햄은 이들을 다시 프랑스로 유학 보냈는데, 프랑스 법원을 비롯한 주요 기관에 침투시켜 프랑스의 대영 전략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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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 대학교는 여전히 영국 정보기관 인력 충원에 활용되고 있으며, 꼭 마찬가지로 CIA는 주요 인력을 하버드와 예일(이 대학들은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창설되었다.)에서 끌어들이고 있다. 자신의 책에서 영국 상류 계급과 정보 기관 활동을 높이 찬양하는 한편,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서도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알렌 덜레스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 “웰싱햄의 지휘 아래에서, 영국 국무장관이 국내 및 국외의 많은 서신들을 중간에서 가로 채, 열어 보고, 읽어 보고, 다시 봉해서 원래 발송지로 재송하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 되었다. 이에 따라 비밀 서신은 코드나 암호로 쓰여져야 했고, 웰싱햄은 이 업무에 관한 전문가, 예를 들면, 토마스 펠리페스[Thomas Phelippes]와 같은 인물을 고용하기도 했는데, 그는 암호문 서기이자, 암호문 분석가의 역할을 했다. : 말하자면, 그는 비밀 코드를 개발하여, 웰싱햄이 가로챈 메시지 안에 집어 넣기도 했던 것이다. 요컨대, 웰싱햄은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전문 정보기관 서비스’를 만들어 냈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내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France’s Cardinal Richelieu]라는 라이벌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가 되기까지 이들만큼의 스파이 전문가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톤: 기억하십시오. 덜레스는 찬탈자들[THE USURPERS] 가운데 한 명입니다. ; 우리가 앞에 썼던 저널들을 다시 읽어보고, 덜레스와 관련된 다른 책들도 검토하여, 이 인물에 관한 당신들의 기억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웰싱햄의 가장 큰 업적은 해군 정보 수집으로, 그가 제공한 정보는, 필립 2세 왕[King Philip II]이 이끄는 스페인 무적 함대[Spanish Armada]에 영국이 맞서는 데 있어 성공적으로 활용되었다. 스페인과 싸우는 와중에, 웰싱햄은 카톨릭에 의해 통제되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와도 동맹관계를 맺었다. (네덜란드 암스텔담[Amsterdam]에서는 유태 랍비들과 여타 동족 유태인들이 이미 모든 권력층에서 통제력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그 때 이미, 지난 시절의 “불공정”에 대해 영국에 복수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임마누엘 레볼드[Immanuel Rebold]의 가장 흥미로운 책인 ‘프리메이슨 일반사[A General History of Freemasonry]’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와 있는데, 바빙턴 사건[Babington affair]이 발생하기 몇 년 전이었던 1561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프리메이슨들이 그녀의 부군에게 종신 그랜드 마스터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데 분개하여, 같은 해 12월 27일, 메이슨 단체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바로 그 날은 메이슨들이 준-연례 모임[semi-annual meeting]를 가진 날이기도 했다. 여왕은 자신의 칙령 수행을 위해 무장한 부대도 파견했다. 그러나, 여왕의 명을 받았던 부대 사령관이 이 모임이 정치적으로 무해한 성격을 띤 것이라고 보고하자, 여왕은 자신의 명령을 철회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의 왕국에서 프리메이슨들의 보호자[protectress]가 되었으며, 프리메이슨들이 토마스 색빌[Thomas Sackville]을 그랜드 마스터로 선택한 것도 추인해 주었다.” 색빌은 자신이 얻게 된 이 새로운 지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귀족들 간에 있어서는 벅허스트 남작[Baron Buckhurst]으로 추대되었으며, 나중에는 제 1대 도르셋 백작[1st Earl of Dorset]이 되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서 프리메이슨들의 조직은 항상 상명하달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대개 대단히 부유한 자들로 구성되었고, 사회내 노동자 계급은 포함되지 않았다.
몇 년 후인 1578년, 프란시스 베이컨 경[Lord Francis Bacon](1561-1626, 영국 철학자, 정치가--역주)은 아직 십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파울렛 대사[Ambassador Paulet] 수행원의 일원으로 템플 기사단 단원[a Knights Templar]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밀 단체에의 가입이 정확히 어떤 절차를 거치는 것인지 궁금해 했으며, 또한 이 단체는 사실상 동성애에 기반한 의식도 갖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가입 초기 단계에 그런 류의 통과 의례를 거치는지도 궁금해 했다. 어떻든 간에, 베이컨은 캠브리지에서의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인해 영국 정보기관의 일원으로도 활동 중인 것으로 여겨졌던 인물이면서, 동시에 평균적인 수준의 메이슨이기도 했다. 오컬티스트 맨리 팔머 홀[Manley Palmer Hall]이 쓴 ‘메이슨 형제단[Masonic Orders of Fraternity]’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게마트리아[gematric](전통 유태 방식에 따라 단어나 문자에 숫자를 할당하는 시스템--역주) 숫자 등치 방식에 따르면 b,a,c,o,n이라는 문자는 메이슨적인 의미로는 숫자 33을 가리킨다.--이는 고대 의식과 전래된 스코틀랜드 의식에 따른 ‘단계’를 가리킨다. 문자 A.U.M.은 아르티펙스 유니베르수스 문디(세계의 위대한 건축가)[Artifex Universus Mundi(The Great Architect of the World)]라는 말로 간주되며, 같은 방식의 숫자적 독해에 따르면 역시 총합이 33이 된다. 따라서 A.U.M.은 ‘베이컨[Bacon]’에 해당하는 카발라[cabala](유대 신비교의--역주)인 것이다.” 그렇지만, 홀이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33단계 프리메이슨들은 이 “위대한 건축가”--즉 루시퍼[LUCIFER]--를 숭배한다는 점이다!
A.D. 1600년, 웰싱햄 사후 10년이 되는 해이자, 세실 경이 죽은 지 2년지 지났을 무렵, 그들의 비밀 승계자들은, 시티 오브 런던에서 소그룹으로 활동하던 부유한 마라노 유태인(신분을 숨긴 유태인들--역주) 상인들[Marrano Jewish Merchants]과 조용한 연대 관계를 맺었으며, 이들은 노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긴급히 무역 독점권[trading charter]을 자신들에게 허가해 줄 것을 강요했다. 무역 독점권이 부여되고 난 후 처음으로 설립한 것이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였다. 정보기관 요원들과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공동 작전의 성공에 크게 흥분했다. 한편, 초기 형성 과정을 거쳐 발전해 나가던 영국 정보 기관은 이제, 이전부터 해오던 모든 작전들의 범위를 대폭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왕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은 인도를 시작으로, 많은 다른 나라들과 무역 카르텔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그들의 지도자에게 이득이 되는 전쟁도 조장했다. 또한 대단히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던 마약 거래의 토대도 형성했다. 2년 후, 암스텔담에서 네덜란드 정부를 좌지우지해 오던 사립의 유태계 은행가들은, 엄청난 이윤의 낌새를 눈치채고, 영국의 전철을 밟아, 마찬가지로 끔찍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했다. 이들은 재빠르게 자신들만의 마약 거래 사업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비극’을 다루는 추악한 일이었지만, 또 하나의 높은 이윤을 남기는 사업에 곧 착수했다.--흑인 노예 무역!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 특별한 유태계 무역상들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으로부터 흑인 노예들을 잡아다가 ‘신 세계(대륙)’에 처음으로 공급했다. 이들은 1619년, 마치 여느 가축들을 다루듯, 버지니아 제임스타운[Jamestown, Virginia]에다 흑인 노예들을 하역했다. 그들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영국의 엘리트들에게도 유사한 인간 화물들을 공급했는데, 다수의 노예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배에 나눠 실린 채, 사나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동안, 냄새나는 갑판 아래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고통 속에 죽어 갔다. 이들 비정한 유태계 노예 상인들은 값싼 장신구, 구슬, 거울, 색유리 등을 오늘날의 나이지리아에 해당되는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물물교환의 대가로 건넸으며, 이 곳 원주민들은 아프리카 내륙 지방을 약탈하여, 다른 흑인 부족들을 포획하고 노예로 사로잡았다. 반드시 주목해야 될 사항이 있다면, 이러한 모든 일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협조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노예 거래를 했던 이들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현대 역사에서 볼 때는, 사실상 두 번째였으며, 처음 노예 거래를 시작했던 건, 그들과 같은 종교를 가졌던 포르투갈 유태인들로, 이들은 약 1세기 전에(1503년) 검은 대륙에서 불행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았었다.(이보다 앞선 시기의 노예 거래는 주로 로마 제국에 의해 행해졌다.)
pp.9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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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기록 #3 하톤
1995년 5월 10일 수요일, 1:09 P.M. 8년 26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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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12 :
[인용]
정식으로 지정된 롯지들[Lodges]과
(신성하지 못한) 킹 제임스[King James] 성경의 탄생
그러는 동안,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마자,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37세된 아들은 영국 국왕이 되었다. 맨리 팔머 홀이 의미심장하게 언급한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또한) 메이슨주의[Masonry]에 호의적이었으며, 정식으로 지정된 롯지에서 메이슨이 되는 과정을 거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대영제국의 제임스 1세가 되었을 때, 그는 메이슨주의를 장려했다. 그를 승계한 찰스 1세[Charles I] 역시 메이슨으로 받아들여진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프리메이슨과 영국 정보기관은, 정보기관 태생 시기부터, 명백하게 그리고 복잡하게 상호 연계되어 있었다. 프리메이슨은 최소한 16세기 중반 이래, 영국 왕실과 영국 귀족 사회에 의해 보호되는[royally protected] 단체였다. 이처럼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제임스 1세나 찰스 1세 모두,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정보기관을 광범위하게 활용했으며, 요원들은 주로 외교관으로 위장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었다.--특히 프랑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불행했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주 격렬하게 반-카톨릭적 태도를 취했으며, 대관식이 있은 지 1년 후 영국내 모든 예수회를 금지시켰다. 이후 1606년에는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카톨릭 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한 대단히 엄격한 법률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그는 햄프턴 궁정 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를 열었으며, 이를 계기로 1611년 아름다운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of the Holy Bible]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새로운 성경을 만든 데에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 그는 이 새롭게 공인된 영어 번역 판본이 1525년에 만들어진 틴달 성경[the Tyndale Bible of 1525]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 사실상 부인할 것을 명령했다.[하톤: 아직도 이러한 성경들에 조작과 변경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틴달 성경은 10년도 넘는 기간동안 윌리엄 틴달[William Tyndale](틴달은 위압적인 주교들과 왕세자들의 뜻에 반해서 작업했으며, 그들은 틴달 성경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이 번역했던 훨씬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성경이었다. 틴달 성경은 고대 그리스어 판본으로부터 직접 번역했던 것으로, 당시 존재하던 다른 어떤 문서들보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웠다. 킹 제임스 성경은 앞선 판본에 나와 있던 진실을 효과적으로 두리뭉실하게 만들어 버렸으며, 예수를 유태인으로 바꿔놓은 데다가[turned Jesus into a Jew],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참된 기독교 프로테스탄티즘을 일종의 휴머니즘적인 독트린으로 변경시키려는 시도도 했다. 그 과정에서, 예수와 그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이기도 했던 훨씬 초기의, 훨씬 정확했던 아람어[Aramaic language] 판본과 비교해 보자면, 엄청나게 많은 변경과 엄청나게 많은 오류들이 생겨났다.[하톤: 당신들이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킹 제임스 판본은 또한, “이사[Isa]”와 “이수[Esu]”에서 유래된 잘못된 명칭(이름)인 “예수[Jesus]”를 보다 확고히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Paul](다소의 사울[Saul of Tarus])이 복음서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진실을 조작한 내용들을 전파하고 다니면서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부분이었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지적하는 “이 문제”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것에 대해 아주 놀라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만약 당신들 가운데 여인들이 나서서 “그냥 사도 바울이 여러분들에게 제시한 것, 그대로 읽으세요”라고 크게 고함치면, 아마 당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도 같군요!]
제임스 왕의 사치와 전제 정치 그리고 그가 주장했던 소위 말하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은 궁극적으로 청교도 혁명[the Puritan Revolution]을 야기했다. 그의 통치 시기, 철저히 부패했던 영국 국교회는, 국민들에게 ‘복지’를 강제하고 국가 종교를 강요하던 교회이자, 봉건 정부의 폭정 은폐를 위해 매수된 영국 정치인들에 부합하여 운영되던 조직으로, 최초 설립 당시의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1607년, 북아메리카에 숙명적인 영국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부터 1620년, 참된 기독교 이주자들이 영국 플리머스[Plymouth, England]를 떠나 메이플라워호[the 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메사츄세츠 케이프 코드[Cape Cod, Massachusetts]에 뉴 플리머스[New Plymouth]를 설립했던 시기는, 제임스 왕의 통치 시기였다. 이 두 번째 사건은, 여로보암[Jeroboam] 왕이 기존 체제에 반대한 유사한 형태의 그룹이었던, 10개 부족을 이끌고, 사마리아에 재정착하여 이스라엘을 세운 지, 정확히 2520년(다니엘서에 나오는 ‘타임, 타임즈, 그리고 하프 타임[a time, times and a half time of Daniel]’)(두 때와 절반으로 2,500년을 의미--역주)이 지난 후에 발생했다.--말하자면 사무엘서 하[II Samuel] 7장 10절의 내용이 두 번째로 완수된 셈이었으며, 그 첫 번째는 이스라엘계 바이킹들의 (스칸디나비아) 이주였다! (‘유태인들의 계보’ 참조--역주)
[하톤: 자, 훌륭한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더 이상 가서 정착할만한 또 다른 “아메리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면, 꽁꽁 언 “극지방”에 가서 정착하겠습니까? 실로 세상이 너무 작아져서, “더 이상은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무언가를 숨기기에 최고의 장소는 바로 코 앞[RIGHT OUT FRONT]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임스 1세 시대, 그의 후원 아래에 있던 그랜드 마스터는 런던의 저명한 건축가 이니고 존스[Inigo Jones]였으며, 그는 그리니치[Greenwich]에 있는 여왕의 저택을 설계한 인물이기도 했다. 후대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1685-1702)은 이 지역내 한 지점을 동과 서를 가르는 “영”점[“0” point]으로 선정했으며, 나중에 바로 이 곳에 왕립 천문대가 들어섰다. : 지리학적 경선은 그리니치 공원 안에 있는 이 지점을 통과하는 선을 여전히 기준 경선으로 삼는다.
이주자들이 영국을 떠나간 지 1년 후, 제임스 왕은 템플 기사단원이자 프리메이슨인 프란시스 베이컨 경을 자신의 최고 참모[his Lord Chancellor]로 지명했다. ; 그러나 곧이어 베이컨은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에 따른 결과로, 그는 더 이상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부득이 은퇴를 맞이하게 된 베이컨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여러 권의 조예 깊은 수필집과 오컬트적이고 철학적인 주제의 저서들을 쓰면서 보냈다. 한편, 바로 그 해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the Dutch West Indies Company]가 설립된 해이기도 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만한 중요한 일이 있는데, 1630년 6월 12일은, 부유한 영국 법조인, 존 윈트롭[John Winthrop]이 지휘했던 아르벨라호[the Arbella]가 영국을 떠나 (메사츄세츠) 살렘[Salem]시에 도착했던 날로, 바로 이 때부터 미국이 미래에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시작되었다. 윈트롭은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서 교육받았으며, 런던 법조계에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찰스 1세 왕[King Charles I]으로부터 동부 메사츄세츠 지역의 할양과 이 지역 정착에 대한 특권[Charter]을 부여받았으며, 그가 이끄는 그룹이 미국을 향해 떠나기 전부터, 그는 메사츄세츠 식민지의 주지사로 이미 선정되어 있었다. 초기 이주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이들 정착자들은 모든 것이 다 마련된 상태로 도착했으며, 이미 고등 교육을 이수한 인물들이었던 데다, 영국 상류계층과도 계속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캠브리지 사람들[The Cambridge Crowd]”이라 불렸던 이들은 엄청난 양의 서적들도 함께 가지고 갔으며, 캠브리지 대학의 일종의 연장으로서,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를 설립했다. 하버드는 그 설립 첫 날부터 자유주의자들[Liberals]의 양성소 역할을 했으며, 그 졸업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명 높은 미국 동부의 여러 기관들을 세웠으며, 바로 그들로부터 미국의 보이지 않는 정부[the Invisible Government]가 생겨났던 것이다.
버지니아[Virginia]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1624년, 제임스 1세는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바로 그 해, 능수능란한 술수를 가졌던 카톨릭 추기경 리슐리외[Richelieu](아르망 장 뒤 플레시[Armand Jean du Plessis])는 소년 왕 루이 13세[the boy King Louis XIII]가 이끌던 프랑스의 최고 수상[Chief Minister]이 되었다. 리슐리외는 이내, 파리에서 활동 중이던 영국 비밀 정보 기관 소속 스파이들의 계속되는 정탐활동에 대한 방어책으로, 그 라이벌이 될만한 프랑스 정보 기관 설립에 착수했다. 이듬 해, 제임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또 한 명의 스코틀랜드계 스튜어트 가문의 프리메이슨으로서, 영국 왕좌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무렵, 암스텔담에 있던 부유한 유태인들은 마침내 다가오는 영국 전복을 위한 이상적인 꼭두각시이자,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해 줄 인물을 발견했다. 그가 바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로, 그는 캠브리지를 졸업한 26세의 청년이자 영국 상류 사회에서 선호되는 유복한 가문 출신의 젊은이였지만,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적절한 후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3년 후, 상당한 배후 작전과 재정적 지원 아래, 크롬웰은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것은 바로, 그렇잖아도 이미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던 영국 국민들에게는 그들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찰스 왕은 당시 대단히 역동적이었던 제 1대 버킹검 공작, 조지 빌리어스 수상[Prime Minister 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의 손아래 움직이는 완전한 도구 역할만을 하고 있었는데, 1629년 수상의 많은 호전적인 계획들에 의회가 순응하지 않자, 수상은 왕에게 의회 해산과 함께 독자적인 왕권에 의한 국정 운영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 때 이후로,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빌리어스는 너무나도 분명히 영국 정보기관 최고위급 관리이기도 했으며, 한 번은 스페인 대사와 함께 독일 팔츠[the German Palatinate] 지방을 스페인이 점령하는 일을 돕는 계략을 꾸며, 맨스펠드 백작[Count Mansfeld]이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별 실익을 챙기지 못한 적도 있었다. 빌리어스가 고안했던 이런 저런 별로 인기 없었던 모험주의적인 시도들을 시행하는 데에 있어, 그가 함께 일하기를 선호했던 인물은 에드워드 세실 경[Sir Edward Cecil]으로, 세실은 영국 정보기관 탄생 초기 공동 창립자였던 버레이 경[Lord Burleigh](윌리엄 세실)의 가까운 인척이었다. 독일 팔츠 개입이 대실패로 끝난 3년 뒤, 빌리어스는 하원에 의해 해고되었으며, 이후 암살되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기다리며, 이러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의 중심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 가지 코치를 받고, 손질 중에 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한편, 영국 역사학자이자 장군이었던 A.H.M 람세이[A.H.M. Ramsay]가 쓴 ‘이름없는 전쟁[The Nameless War]’에서 이미 보았듯이, 유태인들이 조장했던 1640년의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람세이가 “칼뱅의 음모[a Cohenist Conspiracy]”라 부르는 일이 갑자기 발생했는데, 이는 1평방 마일의 구시가, 시티 오브 런던을 중심으로, 중무장한 건달들 또는 “작전 수행원들”의 집단이, 모든 사람들을 위협하고 겁에 질리게 만든 일이었다. 유태인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이 악당들의 수는 “만 명에 육박했다.” 1640년부터 1660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영국 왕실과 국교회를 비난하고,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팜플렛과 전단지 “약 3만장”을 뿌렸는데, 모두 암스텔담과 제네바에서 인쇄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일은 영국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분열시켰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혁명의 불꽃에 부채질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는 영국 정보기관이 이러한 국가 전복 시도의 싹을 자르기 위해 움직였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크롬웰과 크롬웰을 돕는 유태인 후원자들 편에 서 있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불행한 장 칼뱅(존 캘빈)[John Calvin(Chavin/Cohen)]
우리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국가 전복적 성격의 이러한 과도한 비난은 프랑스 유태인이자 “개혁자[reformer]”였던 장 칼뱅[John Chavin]의 광신적인 장광설의 결과였다. 그는 1533년 국가 전복 시도를 이유로 파리에서 추방되었으며, 스위스 바젤로 피난했던 인물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기독교 강요(綱要)[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는 불화를 야기하는 책을 썼으며, 소위 말하는 기독교 칼뱅 운동(칼뱅주의)[Christian Calvinist Movement]의 창시자가 되었는데, 그 때부터 ‘장 칼뱅’이라는 이름이 사실상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영국은 기독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카톨릭이 훨씬 더 많이 수용되었다.)으로 양분되었다. 칼뱅은 “엄청난 수의 혁명적 웅변가들을 만들어 냈으며,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해를 끼쳤다. 말하자면, 종교적 열정이라는 구실 아래, 혁명의 토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그리하여 영국은 두 개의 반대되는 캠프로 분열되었으며, 유태인들은 후에 아일랜드로 옮겨 가서 마찬가지의 일을 했다.
그러한 영리한 분열의 도구 가운데 하나는 “사바스(안식일)[Sabbath]”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그의 비명과도 같은 주장이었으며, 이에 따른 결과로서 1650년, 왕(찰스 1세)이 처형되고 난 후,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그 어느 누구라도 가혹한 형벌에 처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 무렵 영국 상원은 “헤브루 랍비들의 기관”처럼 변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람세이 장군[Capt. Ramsay]에 따르자면, 유태인들의 음모를 추구했던 거리 혁명가들은 “수평파[Levellers]”(찰스 1세 시대 의회파로 구성된 당파원--역주) 또는 “합리주의자들[Rationalists]”로 불렸는데, 이들은 자기 자신들이 만든 “럼프” 국회[“Rump” Parliament](직역하면 “잔여 국회”가 되며,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데 반대하는 의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난 뒤 구성된 의회로, 실질적이고 합법적인 의회 기능을 상실하고 ‘남겨진 의회’를 가리키는 표현--역주)를 구성한 자들이기도 했다. [하톤: 나는 당신들 “애국자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 만약 국회를 재구성하는 것이 이렇게도 쉽다면, 왜 당신들은 당신들의 국회를--현재 의원들의 구성 틀 바깥에서--쉽사리 재구성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들이 항상 내게 “우리는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걸 듣는 데 상당히 지쳤습니다. 한 무리의 외부인들에 불과한 지크들(유태인들)[Zhiks]이 영국에서 이 일을 해냈다면, 분명코 당신들도 당신들의 합법적인 국회를 다시 구성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현재 보유한 법률/재판 시스템은 “전시”에는 완전히 군법에 따라 작동하는 것입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642년, 영국 전역을 휩쓰는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크롬웰은 의회를 이끄는 핵심 세력이 되어 있었고, 그 의회는 이미 2년 전부터 재구성되어 있는 상태였다. 찰스 왕의 지지자들이었던 소위 말하는 왕당파들[Royalists] 또는 기사파들[Cavaliers]과 왕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의회파들[Paliamentarians]”, 또는 라운드헤드들[Roundheads](짧게 자른 머리에서 유래한 명칭--저자주)간에는 유혈이 낭자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크롬웰은 물론 의회파를 지휘했으며, 심지어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에서 병력을 직접 지휘하는 일도 도맡았다. 그리고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무엇보다도 그는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최고의 유태인 군사 전략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톤: 물론,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미국 의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의 유태인들[the Jews in England]”(런던에서 간행)이라는 책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1643년, 한 무리의 유태인 집단이 영국으로 들어 왔는데, 마라노[Marrano](비밀 유태인)였던 포르투갈 대사 데소사[De Souza]가 그 중계 역할을 했다. 그들 가운데 유명한 자로는 페르난데스 카라할[Fernandez Crajal]이 있었는데, 그는 잘 알려진 금융업자이자 군사 청부업자였다.” 실제로 카라할은 크롬웰의 ‘신모범군[New Model Army]’ 구성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그 때, 그리고 그 이후로 크롬웰 주변에 있던 다른 유태인들은, 주로 그의 핵심 참모 역할과 자금 흐름 관리 역할을 맡아 했으며, 그 중에는 암스텔담 출신의 유태인들인 시몬 데 카세레스[Simon de Casseres]와 랍비 메나샤 벤 이스라엘[Rabbi Menassah ben Israel]도 있었다. 랍비 벤 이스라엘은 영리한 선전물 책자인 ‘에스페란사 데 이스라엘(이스라엘의 경험)[Esperanza de Israel(Experiences of Israel)]’의 저자였는데, 이 책은 크롬웰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결국 “그가 유태인들의 영국 입국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 무렵 크롬웰을 도왔던 또 다른 인물 가운데는 존 툴로[John Thurloe]가 있었는데, 그는 정보 총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다. 앨런 델레스[Allen Dulles]가 자신의 책에 기술한 바에 따르자면, 툴로는 자신이 거느리는 많은 스파이들로부터 비밀 정보를 캐내는 데에만 한 해에 7만 파운드도 넘게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러한 기능은 “정보국[Department of Intelligence]”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 기관은 영국 정부의 여러 기관들 가운데 가장 초창기부터 그 공식 기능이 할당된 기관이 되었다. 툴로는 몇 년 뒤 크롬웰이 호국경[Lord Protector](호국경은 영국에서 왕권이 미약할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는 호칭이었으나 크롬웰은 왕정 폐지 후 자신이 호국경이 되면서 왕의 역할을 대신함--역주)으로 있는 코먼웰스[Commonwealth](처음에는 크롬웰 정권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나중에 ‘조직화된 정치 공동체’ 및 ‘영연방’으로 의미가 확대--역주) 아래에서 국무상[Secretary of State]이 되었다.
[하톤: 결국 국민들이 정부와 관련해서 뭐라도 하나 알아 내려면, 당신들은 차라리 다른 행성으로 가서 새로 시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게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영원히” 속이는 은밀한 “작업”도 가능합니다.--이것이 정확히 당신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입니다. 현재의 정부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자국 국민들에게 감추는 일을 주로 하는 “정보” 기관에 의해 구성되고, 또 운영되고 있습니다. 실로 나는 우리를 구성하는 팀과 관련하여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그렇지만 우리는 오직 진실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려는 역사학자들과 다른 많은 저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입니다. 왜 당신들은 우리를 CIA나 onI, 기타 여러 가지 정보기관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실상 진실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인가요?]
1645년 한 해 동안 전장에서의 두 번의 결정적인 패배 이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항복했다.--이들은 이내 그를 크롬웰이 이끄는 적들에게 넘겼다. [하톤: 그렇지만 이 악당들 사이에서는 왕에 대한 어떠한 예우도 충성심도 없었습니다.] 람세이 장군이 밝힌 바에 따르면, 1647년 6월 16일, 올리버 크롬웰은 뮐하임[Mulheim]의 시나고그에 소속된 에베네저 프라트[Ebenezer Pratt]를 통해 암스텔담의 유태인들과 접촉하고, 그들과 공모하여, 찰스 1세를 암살할 것인지, 아니면 덫에 빠뜨려 죽일 것인지에 관한 음모를 꾸미는 일에 착수했다. 람세이에 따르면, 왕에게 씌워진 죄명은 완전한 거짓이었지만, 이는 이삭 도리스라우스[Isaac Dorislaus]라는 외국의 유태인에 의해 고안된 혐의로, 이에 따라 결국 왕은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1649년, 찰스 1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계획대로 유죄판결을 받고 참수되었다. 그 때 이후로, 올리버 크롬웰 장군이 지휘하는 신모범군[the New Model Army]은 의회보다도 더 큰 권력을 휘두르며,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또한 크롬웰은 유태계 병력이었던 “철기군(철갑 기병대, 아이런사이드)[Ironsides]”도 함께 지휘하며, 영국 전역에 걸친 사실상의 군사 독재를 감행했다. 그 때부터 유태 사회주의[Jewish Socialism]가 영국 땅에 전파되었다.
1653년 7월 4일[하톤: 으으으으음?], 올리버 크롬웰은 새로운 “국가 회의[council of state]”(행정부의 기능을 담당--역주)를 설립하고, 140명의 국회의원들을 새로 지명했다. 이 국회는 이후 베어본스 국회[Barebone’s parliament]라고 불렸는데, 완전히 유태인들에 의해 점령된 국회였다. 크롬웰의 최고위 섭정직[the top of Cromwell’s Protectorate]은 존 툴로[John Thurloe]가 맡았으며, 당시 그는 국회의원 신분이기도 했다. 툴로는 심지어 정보기관장의 역할과 우체국장의 역할도 동시에 맡아 하면서, 보다 능률적으로 일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보스에게 주변의 다른 강대국들의 비밀 계획을 지속적으로 알려 주었다. 툴로는 또한 크롬웰로 하여금 왕위를 넘겨 받기를 권유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크롬웰이야말로 외국의 적들을 등에 업고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사실상의 반역자였다. 2년 뒤, 이 세상 어디에 있는 유태인들이건 간에, 모든 유태인들의 공식적인 영국 입국이 크롬웰에 의해 마침내 허용되었다. (이것은 크롬웰이 애당초 유태인들과 범죄적 결탁을 맺었을 때부터, 유태인 후원자들과 체결한 비밀 협정의 일부였다.)
1658년, 마침내 크롬웰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리처드[Richard]가 호국경의 지위를 물려 받고, 일탈한 자신의 아버지의 계획을 뒤따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불과 8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는 사임이 강요되었다. 당신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인가? 너무 멀리 나갔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태인들이 직접 만든 엄청나게 두꺼운 책, ‘서구 문명에 대한 헤브루의 영향[The Hebrew Impact on Western Civilization]’(1951년 총 922페이지)에 보면, 우리는 이 모든 내용들과 관련된 추가적인 사항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111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영국 정부에 대해 지브롤터 해협을 점령하라고 충고한 건 쇼넨버그[Schonenberg]였는데, 이건 마치, 1655년 유태인 시몬 데 카세레스[Simon de Casseres]가 올리버 크롬웰에게 자메이카 섬을 점령하라고 충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537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 “랍비 마나셰 벤 이스라엘[Rabbi Manasseh Ben Israel](1604-1657)은, 크롬웰의 주목을 끌었던, 자신의 책 ‘에스페란사 데 이스라엘[Esperanza de Israel]’을 통해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유태인들의 영국 재입국을 허용하는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영국 정부로 하여금 그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대안도 없도록”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법안의 틀을 직접 짰던 인물이 사실상 랍비 마나셰였다. (같은 책 797페이지에 나와 있다.) 물론 엄청난 실수였다!
리처드 크롬웰이 현직에 있는 동안 툴로는 그를 부친과 마찬가지로 후원했다. 그러나 크롬웰의 신속한 몰락 이후, “모든 영국인들은 왕이 권좌로 되돌아가는 왕정 복고를 환영했다.” 이에 따라, 1660년 5월 8일, 찰스 2세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3주 후 런던에 입성했다. 웹스터 인명사전[Webster’s Biographical Dictionary](1943년)에 따르면, 왕정 복고가 있던 무렵, 크롬웰의 정보 총 책임자였던 존 툴로는 왕의 차기 국무상에 대한 참모 역할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대역죄[charges of high treason]로부터 사면되었다.” [하톤: 나한테, “정보기관 소속 인물”이 아니더라도 정부를 이끌 수 있다고 반박하지 마십시오. 조지 부시는 CIA 국장을 지냈으며, 당신들의 친구 키신저는 KGB 요원이었습니다.] 이듬해 국왕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해외 영토를 확보하고, 임의로 전쟁을 치를 수도 있었으며, 관할권내 영국 국민들에 대한 민사 재판권도 획득했다! [하톤: 미국인들이여, 나는 당신들의 권리를 모조리 빼앗아 갈 수도 있는 행정 명령들(‘공산당 선언의 실현’ 참조--역주)에 대해 당신들이 직접 연구해 보기를 권합니다. 그런 다음, FEMA(연방비상관리청, 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 일반적으로 ‘연방재난관리청’이라 칭하는 기구이나 비상사태 발생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됨--역주)와 ATF(주류, 담배, 화기 및 폭발물 단속국, 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단속을 목적으로 적법 수준 이상의 인권침해가 허용되어 있는 정부기관--역주) 등도 검토해 보십시오.]
그러는 동안, 프리메이슨들 움직이다.
그 사이 프리메이슨들은 늘 그렇듯 막후에서 자신들만의 비열한 계략을 짜느라 분주했다. 1646년 10월 16일, 영국 골동품 수집가였던 엘리아스 애쉬몰[Elias Ashmole]은 워링턴[Warrington]에서 프리메이슨이 되었으며, 런던 메이슨 홀[Mason’s Hall]에서 열렸던 회합에도 참석했다. 내전 기간 왕당파에 속했던 그는, 나중에 가터회(동맹)[Order of the Garter](가터는 영국의 최고위급 기사를 지칭--역주)의 개괄적인 역사를 다룬 책을 펴 내기도 했다. [하톤: 명칭 자체가 “동맹(오더)[Order]” 만큼이나 우스꽝스러워 보입니다.] 애쉬몰은 랍비 솔로몬 프랭크[Rabbi Solomon Frank]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었고, 그를 통해 헤브루어를 배우기도 했다. 라루덴 신부[Abbe Larudan]는 당시 출판된 자신의 책, ‘프리메이슨들이 압도하다[Franc-macons Ecrasse]’에서 영국에서 유태인들이 메이슨 조직을 좌우할 수 있었던 것은 크롬웰 덕택이라고 썼다. 그리고 1648년, 유태계 메이슨들 덕택에 크롬웰은 절대 권력을 거머쥘 수 있게 되기도 했다. 17세기 중반에는 프랑스에서도 프롱드의 난[the Fronde](부르봉 왕조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항에 따른 내란--역주)이라 불리는 유혈이 낭자한 내란(1648-53)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예수회는 파리에서도 정부전복적 성격의 게리네(일루미나티)[Guerinets(Illuminati)]라는 조직체를 창설했으며, 암스텔담의 유태인들은 조만간 폴란드가 맞이하게 될 심각한 문제를 조장하고 있었다. 멀린스[Mullins]의 책, ‘유태인들의 새로운 역사[New History of the Jews]’(84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항이 나와 있다. : A.D. 1655년 유태인들은 영국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해 나가는 한편, 스웨덴 찰스 10세[Charles X]의 폴란드 침공을 비밀리에 돕기도 했다.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는데, 왜냐하면 폴란드계 유태인 지도자들이 사전에 스웨덴 국왕에 밀사를 보내, 폴란드의 방어 역량과 관련된 정보들을 그 구체적인 사항까지 다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찰스 10세의 폴란드 정복 이후, 유태인들은 점령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악질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했으며, 이에 저항한 스테판 차르니에키[Stephen Czarniecki]와 같은 폴란드 애국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찰스 10세와 점령자들을 자국 땅에서 쫓아냈다. 스웨덴인들이 물러가고 난 후, 폴란드인들은 이번엔 유태인들을 집중 공격했으며, 그들의 반역 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30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 국민들이 노예화된 삶을 살고 있는 자신들의 실상에 관련된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면, 마찬가지의 일이 미국에서도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p.101-106
[인용의 끝]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37권 (미간행 저널), “Interesting Dark Games From the Dark Side”, 제 6, 7, 8, 12, 13장, pp.49-65, 96-106에서 발췌
(피닉스 저널 제 137권은 미간행 저널로 원래 제목이 없으나, 하톤은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을 “Interesting Dark Games From the Dark Side”로 정해줄 것을 요청--phoenix)
제 5장, 기록 #1 하톤
1995년 5월 19일 금요일, 6:48 A.M. 8년 27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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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Force], Part 13 :
[인용]
메이슨(건축 석공)[Architectural Masonry](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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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같은 시기, 암스텔담의 유태인들은 미국도 마찬가지로 ‘집어 삼키기 쉬운 나라[ease pickings]’가 될 것이라고 내다 봤다. 멀린스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첫 번째 유태인은 제이콥 바심슨[Jacob Barsimson]으로, 그는 1654년 뉴 암스텔담[New Amsterdam](나중에 뉴욕이 됨)으로 건너갔다. 1960년, 뉴욕에 살던 유태인 학자였던 말콤 H. 스테른[Malcolm H. Stern]이, 사적인 출판의 일환으로 극도로 한정된 부수만을 발간했던, ‘유태계 후손 미국인들[Americans of Jewish Descent]’이라는 책(단 550부만 간행)에 보면, 1654년은 유럽 각국에 거주하던 부유한 세파르딕 유태인들을 태운, “유태인들만의 메이플라워호[Jewish Mayflower]”가 뉴욕에 도착한 해였다고 한다. 이 놀라운 책은 미국 유태인들 약 25,000명의 조상을 16세기까지 정확히 다 추적해 올라가고 있다. 그 중에는 스티븐슨 가문[the Stevensons], 굿윈 가문[the Goodwins], 드랜시 가문[the DeLanceys], 리빙스톤 가문[the Livingstons], 롯지 가문[the Lodges], 티파니 가문[the Tifanys], 홉킨스 가문[the Hopkins], 그리고 록펠러 가문[the Rockefellers]도 있다.(록펠러 가문은 스페인에서 터키로 도망갔다가, 다시 프랑스로 이주했으며, 이후 종국적으로 미국에 도착한 가문으로 원래 이름은 로겐펠트[Roggenfeld]였으나 이후 록펠러로 변경한 가문이었다.) 그들에 앞서 넘어 온 유태인들 가운데는 콜롬부스와 함께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카리브해 연안의 섬으로 오늘날의 도미니카와 아이티--역주)에 도착한 5명의 “마라노스들[Maranoes]”이 있었는데, 이들은 북미 땅에는 사실상 결코 진출하지 않았었다. 바심슨 다음으로 온 유태인은 네덜란드 유태인 헤이맨 레비[Hayman Levy]로 이어서 도착했던 니콜라스 로웨[Nicholas Lowe]와 조셉 사이먼[Joseph Simon]은 이내 레비에 합류했다.--이들은 모두 인디언들에게 값싼 제품들을 파는 무역업을 했다. (그들은 이 전에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the Dutch West India Company]에서 함께 일한 관계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동부 해변 지역에 평화롭게 거주하던 인디언들에게 럼주와 위스키를 파는 아이디어를 처음 고안해 냈던 건 로웨였으며, 이들은 곧 로드 아일랜드, 뉴포트[Newport, Rhode Island]에 증류주 가공 공장을 세웠다.--북 아메리카 최초였다. “짧은 시간 안에 뉴포트에 증류주 가공소는 22 군데가 생겼으며, 모두 유태인들 소유로, 가공소들은 ‘화주[firewater]’(위스키, 럼 등--역주)를 제작, 유통시켰다. 인디언들의 타락, 그리고 초기 정착민들에 대한 학살 등은 모두 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스토리들이다.” 멀린스에 따르면, 그러는 동안 뉴포트는 또한 통상적으로 “유태인들의 뉴포트[the Jewish Newport]--세계 노예 무역의 중심지[World center of Slave Commerce]”라 불리기도 했다. 1600년대 말까지, 6군데의 유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 뉴포트[Newport], 찰스톤[Charleston], 뉴욕[New York],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리치몬드[Richmond], 그리고 사바나[Savannah]. 그럼,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갈까 한다.
찰스 2세가 영국 국왕이 되고 전통의 영국 의회(컨벤션 의회)[the Convention Parliament]가 복구되고 난 후, 코먼웰스[Commonwealth](영연방)의 통치(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도 겸했다.)가 본격화되었을 때, 유태인들과 겪게 되는 문제점들도 다시 재발했는데, 특히 1664년, 유태인들이 배를 타고 대규모로 영국에 입국하면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바로 그 해, 템즈강[the Thames]을 따라 들어 온 유태인들의 배에는 쥐떼들이 들어 있었으며, 이 쥐떼들로 인해 대규모 흑사병이 런던에 창궐하게 되었다. 이 끔찍한 유행병은 1년도 넘게 맹위를 떨쳤으며, 7만 5천명이 사망에 이르렀고, 많은 사람들이 도피를 위해 영국을 떠나가기도 했다. 1666년[하톤: 흥미로운 연도군요.]에는 런던에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9월 2일부터 9월 9일까지, 만 3천 채의 가구, 84개의 교회,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 길드홀[the Guildhall], 다수의 시장, 부두 등을 포함하여 도시 전체의 5분의 4가 파괴되었다. 악재는 항상 연속해서 3번 발생하는 경향이 있었다.
불가사의하게도, 1670년, 도버[Dover]에서는 영국의 새 왕조와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간에 비밀 조약이 체결되었다.--영국에 카톨릭을 부활시키는 조약이었다! 열정적인 동성연애자이기도 했던 프랑스 국왕은 72년간(1643-1715)을 통치한 전제적 독재자에다 위그노들(프랑스 개신교도--역주)의 박해자였다. 2년 뒤, 윌리엄 3세(오렌지 공)는 네덜란드의 세습 군주가 되었는데, 물론 유태인들의 승인과 유태인들의 후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다 1686년 제임스 2세(찰스 2세의 동생으로 찰스 2세 사망에 따라 1685년 왕위에 오름--역주)가 로마 카톨릭을 영국에서 정식으로 승인하려 하자, 이내 유태인들과 프리메이슨들 양쪽 모두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에 따라, 1688년 영국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 시작되었으며, 람세이 장군이 ‘이름없는 전쟁[Nameless War]’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혁명 역시 유태인들이 자금을 댔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솔로몬 메디나[Solomon Medina], 수아소[Suasso], 모세스 마카도[Moses Machado]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부유한 사립의 은행가들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영국을 구해내기 위해”, 네덜란드 오렌지공 윌리엄 3세를 “초대”했으며, 윌리엄 3세가 도착하자 마자 제임스 2세는 피난처를 구해 프랑스로 달아났다. “행복한 군주(메리 모나크)[Merry Monarch]”(영국 국왕에 대한 별칭--역주)는 이제 더 이상 자리에 없었다.(이후 1689-1702년간 오렌지공 윌리엄 3세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국왕을 겸임--역주)
람세이 장군에 따르면, 런던에서 대규모 가신 그룹을 거느렸던 윌리엄 3세의 총 재정 담당과 참모 역할은 솔로몬 메디나[Solomon Medina]가 맡아 했는데, 11년 뒤 그는 공헌의 대가로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교활한 메디나와 함께 왕의 또 다른 앞잡이 역할을 했던 인물은, 나중에 영국 수상이 될 자의 선대 조상이기도 했던, 제 1대 말보로 공작, 존 처칠[John Churchill, first Duke of Marlborough]이었다. 그는 찰스 2세를 등진 핵심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유태 백과사전[Jewish Encyclopedia]’에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는데, 말보로 공작(존 처칠)은 여러 해 동안, 네덜란드 출신의 유태인 솔로몬 메디나[Dutch Jew Solomon Medina]로부터 한 해 급여로 6천 파운드도 넘는 거금을 받았다.” 오렌지공 윌리엄이 새로운 영국 군주로 있는 동안, 지난 세기에 늘 그래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무상[secretary of State]의 지위는 여전히 주의깊게 선택된 프리메이슨이자 정보기관의 고위 관리가 맡았다.
......
이어지는 사건들에 관해서는 멀린스의 ‘유태인들의 새로운 역사[New History of the Jews]’에 보면 구체적인 사항들이 나온다. “1694년 오렌지공 윌리엄은 군대에 지급할 돈이 필요했다. 그는 스튜어트 왕조가 왕권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해 올지도 모른다는 점을 두려워 했기에, 대규모의 상비군을 항상 유지했어야만 했다. 이 때, 그의 참모들은 런던의 상인들과 논의해 볼 것을 제안했는데, 그들 중 다수는 유태인들이었으나, 이들만이 윌리엄에게 빌려줄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윌리엄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한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자신들에게 ‘빚에 대해 발급하는 은행권 화폐’ 발행권을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윌리엄은 이 특별한 요구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동의했다. 결국, 최초의 중앙 은행권이 탄생했으며, 젠타일들은 유태인들이 발행하는 ‘이자를 갖는 은행권 화폐’에 의한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윌리엄은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유태인들은 이 화폐 발행권에 대한 허가를 통해, 사실상 영국 국왕의 권위를 찬탈하게 되었다. 한 나라의 주권은 항상 화폐 발행권과 동일시되어 왔는데, 이제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영국 은행[their Bank of England]”을 통해 이 권리를 획득했던 것이다. 오렌지공 윌리엄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유태인들에게 영국 은행 설립 허가권을 내 주었지만, 수 백 만 명의 젠타일들은 이로 인해 끔찍한 죽음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당신이 내는 고리(高利)’의 탄생 : 모카타[Mocatta]에게 감사
유태인들은 시티 오브 런던에 설립된 이 새로운 은행의 총 책임자로 존 보우블론 경[Sir John Boublon]을 앉혔으며, “영국” 은행[the Bank of “England”]은 신속하게, 영국 동인도 회사(이 무렵에는 “인도 무역 상인 연합 회사[the United Company of Merchants Trading to the Far Indies]”로 불렸다.)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양쪽 모두에서 행해지는 마약 거래를 통한 수입에 대한 자금 세탁과 이체 기관이 되었다. “영국” 은행은 또한 유태인 리더들이 지휘하는 프리메이슨 그룹과 영국 정보기관 양쪽 모두에 대한 자금 지원의 핵심 역할도 했다. 이들은 여전히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대한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포르투갈 태생의 세파르딕 유태인인 모제스 모카타[Moses Mocatta]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1671년 영국에 입국했던 인물로, 영국 은행의 설립과 함께 공식적인 금괴 브로커가 되었다. 그는 당시 국제 금괴 회사인 모카타 & 골드스미드[Mocatta & Goldsmid][하톤: 으으으으으음...]를 창설했는데, 이 회사는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날 300년도 넘은 이 회사는, 소규모의 영국 유태인 은행가들과 긴밀히 연결된 채 움직이며, 국제 거래의 표준 금값을 임의로 “설정”한다[arbitrarily “fixed”]. 오늘날 이 회사의 파트너들로는 N.M. 로스차일드 & 선스사[N.M. Rothschild & Sons Ltd.], 사뮤엘 몬테규 & Co. Ltd.[Samuel Montague & Co. Ltd.], 샤프스 픽슬레이사[Sharps Pixley Ltd.], 그리고 존슨 메테이 뱅크스사[Johnson Mattey Bankers Ltd.]가 포함되어 있다.) 이 “끔찍한 금권력[terrible power of the purse]”을 통해, 이들 막강한 권력의 은행가들은 바로 그 날부터, 이 날 이 때까지, 무기력한 희생자들의 목에서 피를 빠는 뱀파이어들처럼, 영국 국민들의 피를 빨고 그들을 통제해 왔다. 람세이 장군은 이에 대해 재차 확인해 주고 있는데, 이 영국 은행의 설립과 함께, 제도화된 ‘국가 부채[National Debt]’의 개념이 생겨났으며, “이는 유태인 대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대출금으로 발생하는 이자에 대해, 영국이 매기는 세금 위에다 우선적인 상환권을 갖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래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똑같은 일이 채 100년이 지나기 전에 미국에서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국에는 오렌지-나소 기사단[Order of the Kinghts of Orange-Nassau]이라는 배타적인 단체가 존재하는데, 바로 이 시기 형성된 단체로서, 이들은 나소 백작 윌리엄[William, Count of Nassau]을 통한 유태 자본의 영국 침략 및 영국 지배, 그리고 이어지는 “영국” 은행의 설립을 비밀리에 기념하고 있다. 이 단체는 파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t] 타입의 좌파 인사나 여타 같은 부류의 유명 인물들에게 (미트라교의?) 십자 훈장[Officer of the Cross (Mithraic?)]을 수여한다.(이 의심스러운 영예를 안은 최근 인물들 가운데는 급진 유태인이자, 록펠러가 후원하는 사기꾼[Rockefeller-backed quack]인 모리스 피셔베인 “박사”[“Dr.” Morris Fishbein](1889-1976, 의사, ‘미국 의학 협회 저널’ 발행인--역주)가 있는데, 그는 1913년 미국 의학 협회를 집어 삼킨 인물이었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S.W. 바론[S.W. Baron]의 책, “유태인들의 위대한 아이디어들” 319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1697년 초반 런던 증권 거래소는 이내 세계를 선도하는 증권 거래소가 되었는데, 이 기관의 124 회원석 가운데 12석은 영구적으로 유태인들에게 할당되었다.” 이들 12명의 브로커들은 시티 오브 런던으로부터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금 지원을 받았는데, ‘단순히 그들이 이 돈을 최대한 활용했다’고만 언급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진술에 불과할 것이다.
pp.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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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39권 (미간행 저널), “Choices”, 제 5장, pp.44-46
(피닉스 저널 제 139권도 미간행 저널로 원래 제목이 없으나, 하톤은 헌정사[Dedication]에서 이 책의 제목을 “Choices”로 정해줄 것을 요청--phoenix)
http://fourwinds10.com/unpublished_phoenix_journals/
https://truthinlight.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