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th in History

록펠러 카르텔의 기원과 배후 세력

- phoenix - 2022. 8. 7. 22:39

제 7장, 기록 #1 하톤

1990년 5월 24일 목요일, 8:45 A.M. 3년 28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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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신디케이트[The Rockefeller Syndicate]

 

(오늘날 당실들의 행성 위에 살고 있는 가장 용감한 자들 가운데 한 명인 유스타스 멀린스[Eustace Mullins]에게 무한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그 밖에도 많은 용감한 자들이 있고 또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난 당신들이 부디 우리의 보호 속에 머물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선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일 것입니다.)

 

많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록펠러 가문[the Rockefellers]과 외교관계 위원회[the Council of Foreign Relations]가 미 정부는 물론이고 국민들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굵직한 이슈들을 잘 살펴본다면 이러한 가정은 실제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유스타스 멀린스가 존경해 마지 않는 두 명의 저자들인, 이메뉴얼 죠셉슨 박사[Dr. Emanuel Josephson]와 모리스 비얼[Morris Bealle]은 “세계 질서[the World Order]”에 대해 알고 싶다면 모든 다른 측면들은 제쳐두고, 록펠러 가문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진술은 의료 독점에 관한 자신들의 놀라운 연구를 상당히 경시하는 언급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독자들이여, 진실에 근거하여 쓰여진 글들 만큼이나 거짓에 바탕하여 쓰여진 글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모든 글들을 다 읽는 것은 어쩌면 부담이 될 수도 있는 만큼, 부디 우리의 글들을 잘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피닉스 저널을 읽는 것을 이미 관두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권당 평균 200페이지에 달하는 글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은 결코 진실에 눈뜨고 싶지 않은 것입니까?) 멀린스는, 1885년 금권력으로 세계 통제의 정점을 찍은 데다, 1900년 이래로 사실상 미국에 새로이 설치된 식민지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은 물론이고, 런던 정책 그룹[London policy group], 왕립 국제문제 연구소[th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등을 보유한 로스차일드 가문에 주목하여 “세계 질서[The World Order]”에 관해 이와 반대되는 견해를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 정부 또는 점령 정부(미국)는 주로 외교 관계 위원회에 의해 작동되지만, 보조적으로 왕립 국제문제 연구소나 록펠러 재단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록펠러 재단은 정부 기능, 교육 기관, 미디어, 종교, 그리고 입법 기관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자유 선거” 제도를 갖고 있으며, 두 후보 가운데 한 명을 뽑을 절대적인 권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쪽 후보 모두는 록펠러 신디케이트에 의해 선정되며, 록펠러 신디케이트를 통해 자금을 조달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라는 놀라운 제도는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말로 자유 시민들이라고 믿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심지어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유의 종에 금이 가도록 만들기도 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1900년 이래로 국방이라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유롭게 전쟁터에 뛰어 들었지만, 교전 중인 양쪽 병사들 모두는 ‘세계 질서[the World Order]’로부터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신들은 자유롭게 주식 시장에 투자하고 있지만, 주식 거래량과 가격, 가치는 모두 연방 준비 시스템[Federal Reserve System]에 의해 조작, 통제되고 있으며, 이 연방 준비 시스템은 영국 은행[the Bank of England]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식 시장은 정부 통제로부터의 독립성을 자랑해 왔지만, 사실상 단 한 번도 정말로 독립적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당신이 실제로는 “록펠러 신디케이트”의 독재 하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미국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실제로 취해왔던 오랜 노력들을 회고해보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부 세력의 대리인으로서, 어쩌면 단순한 외부 세력이라기 보다는 진정한 ‘세계 정부’의 대리인으로서, “록펠러 가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당신은 이들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미 국민들에 대한 식민 정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그룹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를 (그가 무수한 기업체들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사실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입니다. 록펠러가 미국에서 석유 사업에 있어서 독점적 지위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은 클리블랜드의 내셔널 시티 뱅크[the National City Bank]의 금고를 통해 그에게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록펠러는 결코 독립적인 세력이 아니었고, 록펠러 신디케이트 산하의 어떠한 조직도 독립적 세력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 혹은 마피아[Mafia]도 록펠러 신디케이트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패밀리”가 특정 지역에 있어 위정자들로부터  일정 수준의 자율권을 부여 받은 것처럼 보여도, 사실상 이들 또한 자신들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있어서 항상 완전한 통제 속에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록펠러 신디케이트도 분명하게 정의된 세력 범위 아래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자선” 단체, 사업체, 정책 그룹들도 항상 움직임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록펠러 신디케이트 산하의 어떠한 단체들도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정책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하든 늘 마찬가지입니다.

 

록펠러 신디케이트는 ‘세계 금융 조직[the world financial structure]’의 통제 아래에서 작동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언제 어느 때가 되었든 ‘적절한 금융 통제’에 따라 그들의 모든 자산이 하루 아침에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통제’로서 아무도 이러한 조직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록펠러가 모든 자산을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릴 수 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는 계약에 따라 즉각 살해될 수도 있습니다. 미 법무부는 미국 땅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테러리스트들”은 ‘세계 질서[the World Order]’의 요원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세계 금융 조직[the World financial structure]’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거나 숨겨져 있는 조직이 전혀 아니며, 사실상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조직입니다. 이들은 주요 스위스 은행들, 구 이탈리아 베네치아-제노바[Venetian-Genoese] 은행 축을 이끌던 자들, 세계 곡물 거래의 빅 파이브, 영국 은행을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금융 세력과 예하 상업 은행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로스차일드[Rothchilds] 가문과 오펜하이머[Oppenheimers] 가문을 통해 작동하며, 캐나다 왕립 은행, 몬트리올 은행, 그 밖에 브롱프만[Bronfmans], 벨츠베르크[Belzbergs], 라이히만[Reichmanns] 가문을 포함한 여타 금융 세력들과 같은 캐나다계 대리인들을 통해 식민지 캐나다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연방 준비 시스템[the Federal Reserve System]을 이용한 영국 은행[the Bank of England]의 통제를 통해, 그리고 아편 무역으로 부를 거머쥐었던 보스턴 브라민[Brahmin families] 가문, 그 밖에 들라노[Delanos] 가문과 여타 그룹들, 나아가 록펠러 은행을 본부로 삼고, 체이스 맨하탄 은행[Chase Manhattan Bank],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 그리고 쿤-뢰브사[Kuhn, Loeb Company]와 리만 브러더스[Lehman Brothers]와 같은 미국내 구 로스차일드 대리인들이 세운 금융 기관들의 현대 버전의 그룹들을 통제하고 있는 ‘키신저 네트워크[the Kissinger network]’로 구성된 록펠러 신디케이트[the Rockefeller Syndicate]를 통해 식민지 미국의 금융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록펠러 신디케이트가 ‘세계 금융 조직’의 리스트 상으로는 저 밑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꽤나 주목해 볼만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일까요? 비록 록펠러 신디케이트가 서구 세계의 금융 결정권에 있어서는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현재 식민지 미국의 통제 메커니즘을 장악한 실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록펠러 가문 자체는 모건[Morgans], 쉬프[Schiffs], 바르부르그[Warburgs] 가문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 영향력이 퇴색되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달고 형성된 메커니즘은 완전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그 아래 조직화된 모든 기능들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존 D. 록펠러 주니어의 5남--역주)가 삼변회[the Trilateral Commission]를 만든 이후로, 그는 ‘세계 질서[the World Order]’를 위한 일종의 국제 연락책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주로 ‘공산주의 블록[the Communist bloc]’에게 위에서 하달된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뉴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임무를 수행했으며, 여러 지역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로렌스 록펠러[Laurence Rockefeller](존 D. 록펠러 주니어의 3남--역주)는 의료 독점 체계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사실 그는 열대 지방의 여러 군데 휴양 시설을 운영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efeller, Jr.]와 애비 앨드리치[Abby Aldrich]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아들들, 즉 “부를 타고난 다섯 명[Fortunate Five]” 가운데 생존해 있는 두 명입니다. 존 D. 록펠러 주니어는 애리조나 투산[Tucson, Arizona]의 한 기관에서 사망했으며 서둘러 화장되었습니다. 존 D. 록펠러 3세(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장남--역주)는 뉴욕에 있는 자택 근처의 산책길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조부의 이름을 땄던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차남--역주)는 한 TV 저널리스트의 품에서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같은 시간에 또 다른 TV 저널리스트의 품에서 죽은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사망 후 장시간 동안 은폐되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 그는 콜롬비아 마약 커넥션과 마찰이 있었고, 결코 사소하지 않은 충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마약 수익금이 적절히 배분되지 않았던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윈트롭 록펠러[Winthrop Rockefeller](존 D. 록펠러 주니어의 4남--역주)는 알코올 중독으로 자신의 흑인 남자 친구의 품에서 죽었습니다. 윈트롭이 왜 서둘러 뉴욕에서 아칸소로 이주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리 리즈너[Harry Reasoner]가 TV 인터뷰를 통해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윈트롭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명백히 자신에게 동성애의 미스터리를 가르쳤던 흑인 남자친구에게 추파를 던졌으며, 뉴욕에서 살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윈트롭 록펠러는 이러한 자신들의 유대를 축하하는 의미로 흑인들의 이익을 위한 놀라운 기여를 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뉴욕 이스트 48번가[East 48th Street in New York]에 위치한 어번 리그 빌딩[Urban League building]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건물 2층에는 이것이 자신의 선물임을 알리는 명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헤드리안[Hadrian]이 안티누스[Antinous]에게”(로마 황제 헤드리안과 자신의 그리스 시종인 안티누스와의 동성애 관계에서 따온 표현--역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록펠러 가문이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록펠러 신디케이트의 주요 정책 지령들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그들을 통해 록펠러 가문은 사실상 계속 실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데이비드 록펠러와 같은 인물을 통해, 록펠러 가문은 때때로 “소련의 제 1 가문[the first family of the Soviet Union]”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록펠러와 아먼드 해머 박사[Dr. Armand Hammer]는 ‘미소간 무역경제 위원회[USTEC, US-USSR Trade and Economic Council]’를 움직이는 실세들로서, 이 단 두 사람만이 전용 비행기를 이용해 모스크바 공항을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KAL 007기와 같은 운명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KAL 007기는 격추되지 않았다!’ 참조--역주). 데이비드 록펠러의 가장 중요했던 소련 방문은 “후루시초프[Khrushchev]에게 그가 왔다고 알리라”는 말을 전해 들었던 운명적인 날에 찾아 왔습니다. 러시아인들은 건강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며, 한 과학자는 소련에서 화학 비료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국민에게 커다란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후루시초프는 화학 비료의 사용 축소를 골자로 하는 소련 농업 정책의 일대 변화를 알리는 발표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표는 ‘세계 화학 비료 트러스트[the world’s Chemical Fertilizer Trust]’의 수장을 맡고 있었던 데이비드 록펠러를 분노케 만들었으며, 그는 “끝내[Out]”라는 짧은 한 마디 명령으로 이에 대응했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부와 록펠러 신디케이트 산하 재단들의 명의로 되어 있는 부는 모두 어떤 종류의 정부 통제로부터도 효과적으로 벗어나 있습니다. 1986년 8월 4일자 포춘[Fortune]지에 따르자면, 존 D. 록펠러가 1934년에 창설한 다양한 트러스트들의 부는 오늘날 약 23억 달러에 달하며, 또 다른 2억 달러는 애비 록펠러(존 D. 록펠러의 딸--역주) 명의의 단체들에 돌려져 있습니다.  다섯 아들들이 보유한 트러스트들의 부는 1986년 기준으로 21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트러스트들의 부는 원래 다섯 아들들에게 각각 5천만 달러 수준이었지만, 반 세기 동안 계속된 인플레이션의 영향 등으로 크게 증가했던 것입니다. 포춘지의 평가에 따르자면, 1986년 기준 록펠러 가문의 부는 35억 달러 규모이며(독자들이여, 이건 그저 빙산의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중 9억 달러는 유가 증권과 부동산의 형태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용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작은 기업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타임 라이프 빌딩의 45%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넬슨 록펠러의 인터내셔널 베이직 이코노미사[International Basic Economy Corporation]는 1980년 영국 업체에 매각되었습니다. 수년 간에 걸쳐 록펠러 가문은 자신들의 주요 자산의 임대료를 의도적으로 낮게 책정했는데, 예를 들어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는 16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연간 수익률은 1%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탈세를 위한 아주 편리하면서도 알맞은 방식인 것입니다--이 글을 읽는 동안 잘 주목해 보십시오. 록펠러 센터는 최근 공공 건물로 전환되었습니다--내 기억으로는 일본인들이 이를 구매한 것입니다!(1989년 일본 미쓰비시사가 록펠러 센터를 매수--역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록펠러 가문은 최근 뉴욕 일대에 투자한 자산들을 청산 중에 있으며, 이 자금들을 애리조나주 피닉스[Phoenix], 투산[Tucson], 세도나[Sedona]와 그 밖의 몇몇 주목할만한 지역에 재투자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아직도 초조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여전히 그런가요? 그렇다면, 계속 설명해 나가겠습니다. 당신들이 이를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지켜 봅시다!

 

록펠러 가문의 부의 상당 부분은 조부인 존 D. 록펠러의 탐욕과 무자비함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그런데 그 기원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미 의회 보고서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미국내 3대 로스차일드 은행 가운데 하나였던 클리블랜드 내셔널 시티 뱅크의 초기 자금 지원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존 D. 록펠러는 나중에 쿤-뢰브사[Kuhn, Loeb Company]의 제이콥 쉬프[Jacob Schiff]의 지원도 받아들였는데, 제이콥 쉬프는 프랑크푸르트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태어났던 자로 당시 미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익을 대표하는 (그렇지만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던) 주요 인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클리블랜드 내셔널 시티 뱅크로부터 대출받은 종자돈으로 시작했던 존 D. 록펠러는 이내 “가장 무자비한 미국인”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바로 이러한 특성이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그를 지원하게 되었던 주요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록펠러는 사업 초기에 석유 정제 사업이 단기간에 커다란 수익을 안겨다 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이 분야는 업체간 경쟁에 있어서 어떠한 통제도 없었습니다. 이 때 그의 해결책은 아주 단순했습니다--경쟁 상대들을 모조리 짓밟아 없애버리는 것. 록펠러는 단지 ‘사업상의 결정’에 따라 석유 정제 사업을 독점 구도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록펠러는 모든 경쟁 업체들을 시장에서 쫓아내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다른 사업에 있어서도 교훈이 되겠지만, 록펠러는 우선 선두를 달리는 몇몇 업체들을 공격했습니다. 우선 그는 록펠러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앞잡이들을 시켜서 경쟁 업체를 저가로, 하지만 현금으로 사들이는 제안을 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시장 가격을 급격히 하락시켜 경쟁 업체를 공격했습니다. 또한 경쟁 업체들은 사업장 폐쇄를 각오해야 할 정도의 갑작스러운 파업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노조를 이용하는 것은 록펠러가 항상 사용해 온 기본 전술이었습니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경쟁 업체들은 좀처럼 노사 갈등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러한 전술도 실패로 돌아가면, 록펠러는 안타깝긴 하지만 폭력에 의지했습니다 ; 출퇴근하는 경쟁 업체 노동자들을 구타하기도 하고, 경쟁 업체의 정제 시설을 불태우거나 폭파시키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술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찾으려 했던 자를 찾았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신들의 대리인인 제이콥 쉬프를 클리블랜드로 보내 록펠러의 사업이 보다 확장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1895년 미 상무부 발표 자료에 따르자면,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J.P. 모건사[J.P. Morgan Company]와 쿤-뢰브사[Kuhn Loeb Company]를 이용해 미국 철도 사업의 95%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J.P. 모건은 인명록[Who’s Who]에서 미국 철도 가운데 50,000마일을 자신이 통제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쉬프[Schiff]는 남부 개량 회사[South Improvement Company]라는 유령 업체를 만들어, 정교한 리베이트 거래[rebate deal](판매자가 지급 대금의 일부를 사례금 또는 보상금 형식으로 지급인에게 되돌려주는 것--역주)로 록펠러를 도왔습니다. 그 이후로 어떠한 석유 업체도 이러한 리베이트를 등에 업은 록펠러와의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수법은 나중에 밝혀지게 되었지만, 그 때 이미 록펠러는 미국 석유 사업에 있어서 사실상의 독점을 달성한 상태였습니다. 록펠러의 범죄적 작전에 의해 파산한 한 경쟁 업체 사장의 딸이었던 아이다 타벨[Ida Tarbell]은 처음으로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the Standard Oil Trust](록펠러와 자신의 파트너들이 창업한 회사--역주)의 실체를 알리는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반트러스트 단속관[trust-buster]’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속물적 인간이었던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미국 26대 대통령--역주)에 의해 이내 “추문을 만드는 자[muckraker]”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실상 루즈벨트는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 뿐만 아니라 다른 거대 트러스트들의 지배력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일이 어떻게 되어 온 것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까?

 

다음 반세기 동안 존 D. 록펠러는 종종 사회주의 선전물들 속에서 무자비한 자본주의자의 상징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록펠러는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컴파니[American International Company]라는 회사를 통해 ‘세계 공산주의 운동[the world Communist movement]’에 자금을 제공해 온 핵심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미 ‘세계 지배’를 달성한 상태였지만, 분노의 목소리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두 명의 대표자들이었던 존 D. 록펠러와 J.P. 모건을 향했던 것입니다. 실제 내막에 대한 몇 안되는 폭로 기사 중 하나는 1912년 12월 16일자 ‘트루트[Truth]’ 매거진에 실렸는데,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주었습니다 : “쉬프씨[Mr. Schiff]는 미국에서 로스차일드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는 대형 사립 은행 기관인 쿤-뢰브사의 수장이다(내 생각에 당신들 가운데 몇몇 똑똑한 독자들은 이러한 이름들이 세계 최대 제약 업체들과도--비타민 제조 업체들까지 다 포함하여!--, 모두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또한 금융 전략가로 묘사되는 인물로, 수 년간에 걸쳐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로 알려진 거대 권력 기구에 있어서 ‘재무 장관’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이 인용문 속에 록펠러라는 이름만 쏙 빠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십시오.

 

이처럼 감춰진 요인들로 인해, 미국에서 록펠러 가문이 대단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 국민들이 받아들이기는 상대적으로 쉬운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신화는 ‘록펠러 오일 트러스트[The Rockefeller Oil Trust]’가 미국내 정치적 통제력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군산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가 되면서 보다 강화되었습니다. ‘록펠러 의료 독점[the Rockefeller Medical Monopoly]’은 전 미국의 보건을 통제하는 위치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록펠러 재단[the Rockefeller Foundation]은 예하의 면세 기구들 간의 그물망을 형성하며, 미 국민들의 종교와 교육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습니다. 이러한 신화는 숨겨져 있는 진짜 지배자들인 로스차일드 가문을 잘 위장하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던 것입니다.

 

유스타스 멀린스와 다른 몇몇 연구자들이 지난 25년간에 걸쳐 이러한 내막을 밝혀내고 나자(외계인 연구자들이여, 당신들은 이들이 당신들을 필요로 할 때 어디 있었던 것입니까?), 미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신화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중 간첩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새로운 신화는 세계 시민들을 억압해 온 독점 권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믿는 일군의 열성적인 사람들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이 새로운 “폭로”는 세계 통제권을 두고 록펠러 가문과 로스차일드 가문 간의 죽음을 건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폭로는, 당신이 어느 쪽 요원의 말을 듣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한 가문 또는 다른 한 가문이 소련에 대한 통제권을 이미 확보했으며,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다른 한 가문을 전복시키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로스차일드 가문의 그 누구도 이러한 “전쟁”에 휘말려 희생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록펠러 가문의 몇몇 인물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러한 양 가문 간의 권력 투쟁의 “증거”로 인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설은 넬슨 록펠러가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에게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 “제거”되었다는 일반적인 소문을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록펠러 가문의 인물들의 죽음에 있어서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개입”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사실 역시 무시되었습니다.

 

수 십 년에 걸쳐 이러한 상황들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를 연구해 온 저자(유스타스 멀린스)는 록펠러 가문 사람들의 영향력이 이미 쇠퇴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록펠러 가문”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재정은 J. 리처드슨 딜워스[J. Richardson Dilworth]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 그들의 법률 문제는 존 J. 맥클로이[John J. McCloy]와 다른 신뢰할만한 변호사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진짜 권력 투쟁에 관여하려 했던 자들은 없었으며, 모두가 ‘얼굴없는 관리자들’로 남아 주급을 받으면 생활해 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야망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망적인 가설을 믿는 미국인들은 록펠러 가문의 사람들이야말로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로스차일드 가문을 전복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좋은 미국인들”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주 놀랍게도 이처럼 이상한 이야기는 호기심의 역사 속으로 밀려나기 전까지 거의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J.P. 모건이 유명한 ‘홀 카빈 사건[Hall carbine affair]’(남북 전쟁 당시 J.P. 모건이 소총 5,000정을 개당 3.5달러에 사들여 미 정부에 개당 22달러에 판매한 사건--역주)을 통해, 미군에게 결함있는 총기를 팔아 수익을 남기며 무역업자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존 D. 록펠러 또한 남북 전쟁을 통해 수익을 창출했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인증되지 않은 주류를 연방 군에 고가로 판매하여, 그 수익으로 독점을 향한 드라이브를 걸기 전 초기 자본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석유 사업에 관한 그의 관심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부친이었던 윌리엄 록펠러가 이미 수 년 동안 ‘석유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록펠러는 1842년 피츠버그 인근 타렌텀[Tarentum]의 한 염도높은 우물에서 기름이 섞인 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석유 사업자’가 되었습니다. 우물 소유주였던 사무엘 L. 키어[Samuel L. Kier]는 이 곳의 기름을 병에 담아 치료용으로 팔았습니다. 그와 거래했던 초기의 도매업자 가운데 한 사람이 윌리엄 록펠러였던 것입니다. 이 약제는 처음에는 “키어의 마술 오일[Kier’s Magic Oil]”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나중에 록펠러는 자신의 브랜드를 붙여서 “록 오일[Rock Oil]” 또는 “세네카 오일[Seneca Oil]”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세네카는 당시 잘 알려진 인디언 부족의 명칭이었습니다. 록펠러는 스스로를 “저명한 암치료 전문가, 윌리엄 록펠러”라 선전하며 엄청난 악명과 함께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손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암 치료 센터를 배후에서 통제하고, 의료계를 독점하며, 의료 분야로 정부 지원금과 자선 기금이 몰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인물들이 되었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윌리엄 록펠러는 자신의 현란한 경력을 자랑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 많이 진행되지 않은 모든 종류의 암을 전부다 치료할 수 있다”고 보장했습니다. 자신의 암 치료제가 갖는 엄청난 효과를 내세우며, 이를 병당 25달러의 소매가로 판매했는데, 이 금액은 당시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두 달 치 급여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약제”에는 물에 희석시킨 몇 가지 잘 알려진 이뇨제가 들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짜 약을 팔아 치우던 사기꾼의 후손들이 역사상 최대의 그리고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의료 사업을 독점하고 통제해 나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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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다르마여. 잠깐 쉬었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이 부분을 끝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화 속에 머무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이러한 노고를 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 일을 계속 진행해 나아갈 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삶의 영역에서 다른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로서는 지금 이 시대에 당신 없이는 이 일을 진행해 나갈 수 없다는 점을 부디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 휴식과 휴가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은 당신들의 행성입니다. 그렇지만, 다르마여, 나는 당신마저 아낄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내 손을 잡으십시오. 그럼 내가 필요한 에너지를 건네 주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가치에 기반한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 되겠지요. 하톤은 대기중입니다.

 

 

 

제 8장, 기록 #2 하톤

1990년 5월 24일 목요일, 4:15 A.M. 3년 281일

 

록펠러 신디케이트, 계속[The Rockefeller Syndicate, Continued]

 

장이 열리는 곳마다 떠돌아다니며 행상하던 윌리엄 록펠러는 한 곳에 정착하여 가정을 꾸리기는 힘든 삶을 살아갔습니다. 아들 존은 아버지를 거의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몇몇 심리분석가들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 또는 부친의 사랑의 부재라는 환경이 존 D. 록펠러로 하여금, 거의 반 세기 동안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미국 국민들의 삶에 있어 가장 끔찍하면서도 악의적인 존재감을 갖는 지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독점적인 사업을 일으켜 세우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동료 미국인들을 불구로 만들고 약물에 중독시키고 죽여 없애버리는 데 아랑곳하지 않았던, 돈에 미친 폭군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 어쩌면 중요한 요인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악마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미국 역사상 가장 악마적인 존재 가운데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사악한 존재란 다른 영향력을 이용해 인간의 영적인 측면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존재로 정의됩니다.

 

사실 미국의 저명한 가문들의 족보를 살펴 보면 조상 가운데 한 두 명의 말 도둑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록펠러 가문에 있어서도 윌리엄 록펠러의 사례를 살펴 보자면, 그는 “도둑질하고 호색하라”는 ‘가나안의 뜻[the Will of Canaan]’을 자신의 생애 동안 격언처럼 충실히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말도둑으로 기소되자 결국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 것인지를 아마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윌리엄 록펠러라는 이름으로는 완전히 잠적해버린 후에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윌리엄 리빙스턴 박사[Dr. William Levingston]라는 이름으로 마술처럼 등장하여 자신의 나머지 생애를 살아갔던 것입니다. 죠셉 퓰리처[Joseph Pulitzer](정치인이자 신문 발행인으로 뉴욕 월드 등의 신문을 간행--역주)의 ‘뉴욕 월드[New York World]’지의 한 취재 기자는 뒤 따르는 이야기의 팁을 얻었던 것입니다. 뉴욕 월드지는 윌리엄 에버리 록펠러[William Avery Rockefeller]가 1906년 5월 11일 일리노이주 프리포트[Freeport, Illinois]에서 사망했으며, 그 곳에서 그는 윌리엄 리빙스턴 박사라는 이름으로 묘비없는 묘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윌리엄 록펠러에게 있어서 의료계 종사자라는 직업은 자신이 더 선호했던 일인 말도둑질을 수행하기에 멋진 조건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침에 이웃 카운티를 방문했다가, 저녁이면 자신의 마차 뒤에 훌륭한 종마 한 마리를 묶은 채 유유히 큰 길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것입니다. 엽색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에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 그는 “여자에 미친”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이나 정치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부류인지를 알아 보셨습니까? 그는 여러 명의 여자들과 중혼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통제되지 않는 욕구를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독자들이 이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 또한 사탄의 선물인 것입니다.

 

1849년 6월 28일, 그는 뉴욕주 카유가[Cayuga, New York]에서 자신이 고용한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 나중에 그는 뉴욕주 오스웨고[Oswego, New York]에 거주중임이 밝혀졌지만, 이번에도 또 다시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야반도주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여자들의 뒤꽁무니를 쫓아 다니는 데 아무런 금전적 어려움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기적적인 암 치료제와 여타 약품들의 판매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라운 효능의 도찰제(연고의 일종--역주)”는 한 병에 2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이 약은 원유에서 가벼운 기름을 증발시킨 후 남게 되는 무거운 파라핀 용액, 윤활유, 그리고 타르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윌리엄 록펠러가 처음 만들었던 기적의 오일은 꽤나 최근까지도 ‘누졸[Nujol]’이라는 이름의 ‘약제’로서 살아 남았는데, 주로 원유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완제[laxative]의 일종으로 팔렸습니다. 누졸은 단지 판매용 명칭으로 “옛 오일”에 반대되는 “새로운 오일”이라는 뜻일 뿐이었습니다. 누졸은 변비 치료제로 판매되었지만, 지방 용해성 비타민 흡수를 차단하는 기능을 가졌습니다. 미네랄 오일이 장 내벽을 덮게 되면, 많은 종류의 필수 비타민과 다른 영양 성분들의 흡수를 차단시켰던 것입니다. 건강을 신경쓰는 사람들을 위해 카로틴[carotine] 성분이 추가되어 있었지만, 어떠한 효과도 없었습니다. 누졸은 뉴저지 스탠다드 오일사의 계열사인 스탠코[Stanco]라는 회사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회사가 만든 또 다른 제품은 같은 성분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잘 알려진 살충제이기도 했던 플리트[Flit]였습니다.

 

“이해 충돌”을 보다 넓게 해석하게 되었던 몇 년간에 걸쳐 미 상원은 누졸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이해 충돌’ 문제도 결국 제기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록펠러 가문의 이익을 위해 일하던 행상인 출신의 상원 의원, 로얄 S. 코퍼랜드[Royal S. Copeland](1923-1938년간 뉴욕주 상원의원--역주)가 이를 잘 수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코퍼랜드는 한 때 의사이기도 했던 인물로 록펠러 가문이 그를 뉴욕주 보건부 장관으로 지명했고, 나중에 상원 의원이 될 때에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것입니다. 코퍼랜드가 보여줬던 명백한 ‘상업주의’에 기반한 의정 활동은 워싱턴의 가장 게으른 언론인들 조차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상원 의원으로서의 커리어 대부분을 누졸을 홍보하는 데 바쳤습니다. 매일 아침 자신의 의원 사무실의 마이크가 켜질 때면, 늘 첫 번째 지시사항은 누졸 판매 사업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대가로 매년 75,000달러를 수령했는데, 1930년대로서는 엄청난 고액 연봉으로, 미 대통령의 급여보다 높았습니다. 코퍼랜드 상원 의원은 이러한 자신의 ‘업적’으로 미 의회에서 여러 개의 별명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는 종종 ‘미 의학 협회[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상원의원’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미 의학 협회와 모리스 피쉬베인[Morris Fishbein](미 의학 협회 저널 편집자--역주)이 내놓는 프로그램이라면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그는 종종 ‘스탠다드 오일사의 상원의원’으로도 불렸습니다. 그는 록펠러 가문의 독점적 이익을 보다 확대시켜 줄 수 있는 법안이라면 무엇이든 다 지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38년 ‘식품 의약품 법안[the Food and Drug Act]’에 대한 의회 논의가 진행중인 동안, 그는 여성 상원 의원이었던 레오노르 설리반[Leonor Sullivan]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의사 출신의 코퍼랜드 상원 의원이 이 법안에 관한 의회 토론 중에 비누는 이 법의 적용으로부터 면제되어야 한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만약 비누가 제외되지 않는다면, 미국 최대 광고업자들이기도 한 비누 제조업자들은 다른 미국 대형 업체들과 함께 이 법안에 반대해 싸우게 될 것임을 코퍼랜드 상원 의원도 잘 알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설리번 의원은 “비누는 이 법안에 따르자면 공식적으로 화장품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염색약 제조업자들은 특별한 경고 문구를 부착한다는 조건으로 위험 물질의 시장 판매에 대한 인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용실을 이용하는 여성들 가운데 그 누구도 염색약 통에 붙어 있는 문구를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라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윌리엄 록펠러가 개인적인 집착과 여자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낸 것처럼, 존 D. 록펠러도 마찬가지로 집착증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여자에 미친 것이 아니라 돈에 미쳐 있었으며, 끝없이 부와 권력을 증대시켜 나가는 데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렇지만, 록펠러가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뤄냈던 주요 성취들, 말하자면, 독점을 위한 리베이트 기술, 미국 시민들 위로 군림하는 권력 쟁취를 위한 재단 설립, 중앙 은행에 해당하는 연방 준비 시스템의 창설, 세계 공산 혁명의 지지, 의료 독점 체제의 구축 등은 모두 로스차일드 가문과 그들의 유럽 출신의 수하들의 지원 아래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존 D. 록펠러와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 보면, 단 한 가지도 그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뤄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선 재단에 대한 면세 개념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앞잡이였던 조지 피버디[George Peabody]가 1865년 맨 처음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기해 볼 수 있겠지만, 록펠러 재단도 ‘피버디 교육 재단[the Peabody Educational Foundation]’이 록펠러 재단으로 변경된 것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이 당시에는 잘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변모되어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존 D. 록펠러가 아무리 악마 같은 사고 방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을 것 같지는 않은 것입니다. 역사 사회학자들은 19세기 후반 ‘자선 재단의 설립’과 ‘세계 공산주의 운동’이 커다란 동력을 형성했던 일을 두고, 어쩌면 바퀴와 불의 발견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인류 역사의 단면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은 쥐들이 고도의 지능을 가질만큼 진화하여 작은 치즈 조각으로 인간들을 유인하여 덫에 가둘 수 있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이후로 인류의 역사는 정말로 쥐들이 인간들을 덫에 가둬 잡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실로 오늘날 모든 정부에서 다 발견되는 ‘사회주의[socialism]’는 쥐가 약간의 치즈 조각으로 인간을 잡기 위해 만들어 둔 덫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유스타스 멀린스가 처음 제시한 것으로 나 역시 이를 변경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는 가장 사실적이면서도 희화화된 묘사이기 때문입니다--약간의 풍미를 곁들여 해로운 약을 먹이는 것입니다.

 

‘하원 은행 및 통화 위원회[the House Banking and Currency Committee]’ 의장이기도 했던 라이트 패트먼[Wright Patman] 하원 의원은 의회 회기중 록펠러 재단의 설립은 스탠다드 오일사가 다른 업체들과 경쟁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막아주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시장으로부터 지배 주[controlling stock]의 제거 또는 경쟁 업체의 인수가 보다 수월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납세자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부담이 되는 세금이 스탠다드 오일사에게는 면제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혼인을 통해 록펠러 가문의 일원이 되었던, 상원 공화당 리더였던 넬슨 앨드리치[Nelson Aldrich]는 ‘일반 교육 위원회 헌장[the General Education Board charter]’의 상원 통과를 위해 밀어 부쳤지만, 록펠러 재단에 관한 조항을 포함시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독점적 행태에 대한 비판은 널리 퍼져 있었고, 과세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노력 또한 뻔히 들여다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헌장은 1913년 마침내 통과되었습니다 (메이슨들에게 있어서 13은 중요한 숫자였습니다--1913년은 누진 소득세와 연방 준비 법안[the Federal Reserve Act]도 함께 통과된 해였습니다). 또 한 명의 ‘스탠다드 오일사의 상원의원’(그 밖에도 몇 몇이 있었습니다)으로 불리던 로버트 F. 와그너[Robert F. Wagner] 뉴욕주 상원의원이 이 헌장에 대한 상원의 동의를 억지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결국 이 헌장은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efeller Jr.], 또한 록펠러 가문이 설립한 시카고 대학의 총장이었던 헨리 프렛 저드슨[Henry Pratt Judson], 록펠러 연구소 소장이자 인명록[Who’s Who] 상에 “존 D. 록펠러의 자선 활동 고문”으로 묘사되었던 사이먼 플렉스너[Simon Flexner], 그리고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던 찰스 W. 엘리엇[Charles W. Eliot]에 의해 서명되었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석유 사업 독점은 오늘날 125년도 넘었습니다. 하지만 1911년 연방 대법원은 국민들의 분노에 고개를 숙이고, 그룹의 해체를 지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록펠러 가문의 이익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멤버들은 해체로 인해 재편된 모든 “새로운” 회사들의 주식 2%를 보유하는 한편, 록펠러 재단 또한 각각의 회사들의 주식 3%를 보유했습니다. 이로 인해 록펠러 가문이 보유한 전체 주식은 모든 회사들에 있어서 5%에 이르렀습니다 ; 일반적으로 어느 회사의 주식을 1%만 보유해도 통제력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입니다.

 

록펠러 가문이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증진시키는 데 개입했던 것 또한 자신들의 사업 상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사상[Marxist ideology]에 대한 헌신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단지 ‘써먹을 수 있을 만한 것’이 거기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스탠다드 오일사는, 상당한 돈벌이가 되는 유럽 시장 통제권을 두고 로얄 더치 셸[Royal Dutch Shell]사와 치열한 경쟁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의회 증언에 따르자면, 록펠러는 1905년 레닌[Lenin]과 트로츠키[Trotsky]가 공산주의 혁명을 선동할 수 있도록 상당한 돈을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록펠러의 은행가였던 제이콥 쉬프[Jacob Schiff](록펠러의 이익이자 로스차일드의 이익을 대표--역주)는 과거 러일 전쟁 동안 일본인들을 위해 재정을 지원해 주었으며, 개인적인 밀사였던 조지 캐넌[George Kennan]을 러시아로 보내 약 20년 동안 차르[Czar]에 대항한 혁명 활동을 수행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1905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레닌은 1917년까지 스위스에 “보관 되어” 있었습니다. 트로츠키는 미국으로 갔는데, 이 곳에서는 그는 월세 한 푼 내지 않고 스탠다드 오일사가 소유한 오일탱크 적재지였던 뉴저지주 베이온[Bayonne, New Jersey]에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차르가 퇴위했을 때, 트로츠키는 뉴욕 남부 이스트 사이드[Lower East Side]에서 차출한 300명의 공산주의 혁명가들과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록펠러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부탁하여 트로츠키를 위한 특별 여권을 마련해 주었고, 그가 안전하게 러시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링컨 스테픈스[Lincoln Steffens](탐사보도 기자--역주)를 함께 보냈습니다. 록펠러는 여행 경비 명목으로 트로츠키의 호주머니에 10,000달러를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제 9장, 기록 #1 하톤

1990년 5월 25일 금요일, 7:20 A.M. 3년 282일

 

하톤은 여기 와 있으며 빛 속에서 작업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오, 당신들은 넬슨 록펠러 살인 사건의 피비린내 나는 실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유스타스[Eustace]의 글을 다루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장광설을 늘어 놓아 어쩌면 출판업자는 나를 해고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탄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당신들은 짧고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을 듣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명확한 정보를 원하십니까? 만약 당신들이 비밀 정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를 원한다면, 99.9%의 당신들에게 있어서 이 글들이 바로 답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는 분들은 부디 인내심을 가져 주십시오. 우리는 답변을 줄 수 있겠지만, 우선 당신들은 당신들의 사고 방식 속에 너무나도 고착화되어 있는 ‘세계 질서[world order]’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먼저 알아야만 하며, 지금이 그러기에 가장 적절한 타이밍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적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벌리[Oberli]여, 이 무거운 주제에 관한 글은 어쩌면 익스프레스[Expresses]지(피닉스 저널의 자매지--역주)에 3, 4차례 나눠서 게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신문을 필요로 하는데, 감히 진실을 말하는 모든 저자들의 글들을 제 때 싣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저자들은 정말로 이제 몇 명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두 명의 저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한 분은 피터 데이비드 비터 박사[Dr. Peter David Beter]이고 다른 한 분은 로버트 멘델슨 박사[Dr. Robert Mendelson]입니다. 당신들은 이 분들의 최고의 저작들을 지역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유스타스 멀린스도 음모를 주제로 이해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썼지만, 대부분의 도서관들은 이 책들을 서가에 진열하지 않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내 이 책들은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제거됩니다. 서점들 또한 이러한 책들을 판매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 합니다--우리 피닉스 저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이 이 책들을 찾지 않는 한, 이러한 일들은 계속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장막이 더 짙게 드리워지기 전에’ 이러한 책들의 출판이 계속되도록 요구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때 조지 그린(저작권과 관련한 그린과의 법적 다툼이 있기 전에 쓰여진 글--역주)과 같은 용감한 출판업자가 나타나, 우리가 계속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한, 이 글들이 출판될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바입니다! 부디 이러한 저자들, 특히 유스타스 멀린스와 같이 아직 살아 남아 있는 저자들의 활동을 지지해 주십시오 ; 또한 불공정한 법정과 같은 곳에서 음모가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자금이 필요한 만큼, 아메리카 웨스트 출판사의 책들을 구매해 주십시오.

 

비록 존 킹 박사[Dr. John King]는 불과 2-3주 전에 “제거”되었습니다만, 그의 뉴스레터를 계속 지지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의 마지막 책이 출판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어, 어떠한 출판업자도 감히 이를 출판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작업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질 수 있도록 아들인 존 킹 주니어[John King Jr.]와 함께 작업하고 있으니, 부디 이 일을 담당하고 있는 조지 그린을 지원해 주십시오. 킹 박사는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가 진실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고 말았습니다. 나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주어졌던 사람들 가운데, 비록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삶에 내가 개입하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적어도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직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종종 세미나와 같은 행사에서 나의 메시지를 흉내내려는 자들이 있었지만, 나의 현존 앞에 그들의 속임수는 들통났고 이내 달아나곤 했습니다. 그럼 그런 것이지요.

 

심장마비? 오 제발...!

 

자,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그 배경이 되는 또 다른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러시아가 처음 달 착륙에 성공했다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때는 1977년 10월 16일이며, 장소는 쥘 베른 크레이터[Jules Verne Crater] 뒤쪽이었습니다 ; 바로 다음 달 말 경 러시아의 충전 입자 빔 무기는 이미 가까운 곳에서 작동이 가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미국 기지에 있던 빔 시스템은 진작에 파괴되고 난 후였습니다(‘하비스트 문 우주 전투’ 참조--역주). 자, 이제 그로부터도 10년이 흘렀습니다. 많은 다른 일들도 벌어졌지만, 우리는 지금 넬슨 록펠러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부디 너무 멀리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이 러시아의 달 기지 시스템은 지구 상의 어떠한 지점이든 채 2초가 지나기 전에 파괴할 수 있습니다. 이 기지는 러시아의 삼각 우주 전력[the Russian space triad]의 두 번째 기둥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1977년 12월 2일, 러시아의 삼각 우주 전력의 세번째 기둥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당신들의 리더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그 날, 엄청난 대기 지진들[air quakes]--대기 중의 엄청난 굉음--이 미국 동부 해안 지역을 따라 퍼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리들은 러시아인들이 코스모스페어[Cosmospheres]라고 부르는 놀라운 ‘러시안 공중 부양 플랫폼들[Russian Hovering Platforms]’로부터 나는 것이었습니다(‘미 우주왕복선과 러시안 코스모스페어’ 참조--역주). 이들은 입자 빔 무기로 완전 무장되어 있으며, 당신들이 현재 보유한 비가시장[invisible shields] 시스템으로는 모든 방향에서 발사되는 (위쪽을 포함하여) 그들의 입자 빔 무기 공격으로부터 어떠한 배도 비행기도 결코 보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기들은 1976-1977년에 걸쳐 실전 배치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우주 전력은 록펠러 카르텔이 주의깊게 준비해온 완벽하고 놀라운 대러 선제 핵공격 계획을 완전히 망쳐 놓을 수 있었으며, 동서간의 군사 균형도 완전히 뒤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적인 권력을 보유했던 록펠러 4형제의 리더십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판단에 있어서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고, 그들의 그러한 판단력은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연대 세력과 동맹들에게 있어 더 이상 쉽사리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처럼 변화된 상황에 대응하는 어떤 일들이 신속하게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리고 몇가지 다른 이유들로, 록펠러 카르텔의 권력은 점차적으로 바로 당신들의 멋진 미국 땅 안에서 활동하던 새로운 볼셰비키 혁명가들(아메리칸 볼셰비키--역주)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러시아에 맞설 목적으로, 공산 중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는 일이 전 세계에 걸쳐서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 미국에서는 ‘중국 카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헛소리였으며, 실은 중국이 ‘미국 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목표는 향후 전개 상황을 위한 최상의 조건으로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77년 록펠러 4형제는 자신들의 왕조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런 저런 미봉책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렇지만 이는 마치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서 헤엄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진정한 왕조들의 자연적인 수명은 대개 약 100년이라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따라서 록펠러 왕조가 약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자 역사의 흐름에 부합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몇 가지 일들이 벌어졌고, 록펠러의 영광도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존 D. 록펠러 3세(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장남)는 알려진 바에 따르자면 자동차 사고로 죽었지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뉴욕주 포칸티코 언덕[Pocantico Hills, New York]에 있는 자택 근처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하톤). 그리고 나서 1979년 1월 26일, 존 D. 록펠러 3세 사망으로부터 약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차남이던 넬슨 록펠러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후 찾아온 혼란!

 

살아 생전 넬슨 록펠러는 유명해지기를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베일에 싸였고, 답변되지 않은 무수한 질문들이 있었으며, 또 그 중 많은 질문들에는 답변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원 의원 또는 부통령과도 같은 고위직 인사의 시신은 잘 안치하여, 국민들이 마지막 존경의 뜻을 표하게 만드는 것이 꽤나 관습적인 일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넬슨 록펠러는 대통령에 출마한 경험도 있는 데다,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던 유명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미 상원 지도자들이 뜻을 모아 이러한 행사를 워싱턴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넬슨 록펠러 가족들에게 제시했지만, 거부되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유해 공개도 없었으며, 아무도 그의 시신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죽음은 극비로 관리되었고 신속하게 화장되었는데, 전혀 과장없이 이야기한다고 치더라도, 록펠러 가문의 인사의 죽음 치고는 가장 이례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신속하고 짧게 진행된 데다, 엄격하게 사적인 추도식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넬슨 록펠러의 측근들은 1월 29일 오전 11시에 추도식이 열리고 곧이어 당일 아침에 화장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렇지만, 이 공식 발표 조차도 혼동과 모순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 넬슨 록펠러의 죽음에 관한 상황 보고 또한 마찬가지로 모순적이고 이상했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야기했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은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는 과정에서 거의 한 시간 단위로 말을 바꿨으며, 화장 작업은 보다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실제로 시신 소각은 하루 앞선 일요일 아침에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오후 늦게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넬슨 록펠러가 화장되었다는 소식을 알렸지만, 처음에는 어떤 화장장이 사용되었는지 알리지 않았으며, 이렇게 서둘러 일이 진행되는 이유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추도식이 다음 날 월요일 아침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국가의 운명과 세계에 미친 파급 영향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상한 상황들은 단순히 무서운 수수께끼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이 일은 미국과 서구 문명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습니다. 넬슨 록펠러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대외적으로 공개된 인사가 되었던 자로, 그들 가운데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두 달 전 가이아나에서 발생했던 대량 학살 사건과 마찬가지로(‘가이아나, 존스타운 사건의 실체’ 참조--역주), 넬슨 록펠러의 죽음은 당신들의 삶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남극 지역과 포클랜드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기억하십니까?(‘포클랜드 전쟁의 내막’ 참조--역주)

 

가이아나 사건 당시 발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인물에 대한 진실을 감추기 위해 사건의 정황을 수시로 변경하는 연막 작전이 구사되었습니다 ; 하지만 가이아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진실은 결국 밝혀지고 누군가가 발설하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에 언론들은 넬슨 록펄러가 록펠러 센터 56층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 책상에서 일을 하는 동안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사망 시점은 1979년 1월 26일, 금요일 저녁 P.M. 10시 15분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다음 날 모순적인 이야기들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록펠러 센터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웨스트 54번가 13번지[13 West 54th Street]에 위치한 연립 주택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1월 28일, 일요일자 뉴욕타임즈지에 따르면 “이웃들과 지나가던 행인들에 따르자면, 앰뷸런스가 도착했을 때,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이 웨스트 54번가 13번지 건물에서 나왔으며, 넬슨 록펠러를 차량으로 옮기는 보조 요원들이 함께 뒤따랐던 것”입니다. 토요일 오후가 되자, 공식 사망 장소는 연립 주택 주소지로 변경되었습니다. 1월 28일, 일요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인 휴 모로우[Hugh Morrow]의 보고에 따르자면, 넬슨 록펠러는 금요일 저녁 P.M. 10시 15분에 웨스트 54번가 13번지 건물 일층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쓰러졌으며 즉각 사망했다고 한다. 모로우의 최초 보고에 따르자면,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센터 56층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모로우가 밝힌 다음 언급도 인용했습니다 : “실제로 넬슨 록펠러의 죽음은 그의 사적 소유지인 건물에서 발생했습니다. 오류가 발생했던 책임은 전적으로 제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내 새로운 의문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이 미스터리한 여자는 누구였던 지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일요일자 뉴욕타임즈지에 따르자면, 록펠러 가문 대변인인 모로우는 넬슨 록펠러가 사망하던 시점에 어떤 여자가 곁에 있었는 지에 대해 자신은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 하지만 그는 911로 응급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확인되지 않은 이웃 여자”였다고 했습니다. 구급차를 불렀던 유일한 전화가 911을 통한 것으로 알려지자, 이와 관련한 더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첫째로, 이 번호는 뉴욕 시민들이 잘 알다시피, 경찰을 부르거나 화재 발생시 사용하는 일반적인 공공 번호로 좀처럼 즉각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번호였습니다--또한 사적인 구급차를 부르는 용도로 이 번호가 사용된 사례가 없었으며,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1시간이나 지난 후에 전화가 걸려온 점도 이상했습니다. 그렇지만, 토요일까지도 모로우 대변인은 넬슨 록펠러 사망 시점에 경호원 1명과 운전 기사 1명이 록펠러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전화가 걸려온 시점과 관련된 의문은 더 커졌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은 사망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바꾼 후에도 넬슨 록펠러가 P.M. 10시 15분에 사망했다는 주장은 고수했습니다. 그렇지만, 경찰 기록에 따르자면 911로 전화가 걸려온 시점은 1시간이 지난 후인 P.M. 11시 16분이었습니다. 이 잃어버린 한 시간동안, 넬슨 록펠러의 부하들은 시신에 대한 부검이 없도록 상황을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자, 나는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그렇지만, 악한들의 무리 가운데는 항상 입이 싼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또 이를 방조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다음 날인 1월 28일 일요일,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 모로우는 자신의 세 번째 버전의 언론 브리핑을 내놓았습니다. 월요일자 뉴욕타임즈지에 따르자면,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 “넬슨 록펠러의 사망은 실제로는 P.M. 11시 15분에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망 시점에 곁에 있었던 두 사람은 경호원 앤드류 호프먼[Andrew Hoffman]과 31세의 매간 루스 마르셱[Megan Ruth Marshack]이었습니다. 마르셱양은 록펠러가 최근에 진행 중이던 예술 사업의 보좌관이었습니다. 그녀는 불과 몇 건물 건너에 있던 웨스트 54번가 25번지[25 West 54th Street]에 살고 있었고, 넬슨 록펠러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지 1분 후에 전화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토요일, 모로우 대변인은 넬슨 록펠러 곁에 있었다는 여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르셱양의 나이 또한 바로 다음날 31세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요일자 뉴욕타임즈지는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이 내놓은 이처럼 새롭게 정정된 이야기를 두고도 “시간 문제에 관한 불일치는 없었으며, 압박감 속에서 몇몇 사람들이 실수를 범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뉴욕타임즈지에 따르자면, 모로우 대변인은 마르셱양이 연립 주택에 도착한 시점은 금요일 저녁 P.M. 9시경이었으며, “검은색의 긴 이브닝 가운을 입고 왔다”고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로우 대변인이 1월 28일 일요일 세번째 언론 브리핑을 가졌을 때, 가장 중요한 의문 가운데 하나는 사망 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넬슨 록펠러의 시신은 이미 진작에 화장되고 난 이후였습니다. 부검을 통해 진실을 밝힐 수도 있었던 기회가 이미 사라졌던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자면 이와 관련한 혼동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1월 28일 일요일자 뉴욕 데일리 뉴스[the New York Daily News]지에 따르자면, 록펠러 가문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은 “넬슨 록펠러가 지난 주 무렵 가슴 통증을 호소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록펠러에 대한 기사가 홍수를 이뤘던 같은 신문 지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습니다. 40년이 넘게 넬슨 록펠러의 주치의였던 케네스 라일랜드 박사[Dr. Kenneth Ryland]는 “내가 지난 주 수요일 그를 검진했는데 그는 완벽한 건강 상태였습니다. 나는 완전히 충격을 받았습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앞선 7월 교통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진 넬슨 록펠러의 형, 존 D. 록펠러 3세의 이상한 죽음(여기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자, 어쩌면 이는 또 다른 이야기일 것입니다)과 마찬가지로, 실제 벌어진 일들은 결코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넬슨 록펠러와 함께 있었던 이 “이상한” 여인은 곧 격리되었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경호 속에 뉴욕주 웨스트체스트 카운티[Westchester County, New York]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들은 넬슨 록펠러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숨기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직 혼동스러운 정황만이 알려질 뿐이었고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어떤 것도 명쾌하게 설명되거나 제대로 추적되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친애하는 자들이여, 운명의 금요일 밤 벌어졌던 일에 있어서 어떠한 혼동도 없었습니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늘 그렇듯 정보기관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며, 넬슨 록펠러의 심리학적 기록들도 충분히 활용되었습니다. 그는 대개 금요일 저녁이면 가족들과 식사를 마친 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웨스트 54번가 13번지[13 West 54th Street]에 있는 자신의 5층짜리 연립 주택으로 갔습니다. 이 때가 되면, 자신이 거느린 많은 무장 경호원들도 비번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1월 26일 금요일 저녁에도 그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자신의 연립 주택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긴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무언가”를 하는 데 “심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경호가 완전히 풀려 있던 바로 그 순간, 정확히 그 순간에 한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습니다!

 

전문 킬러의 솜씨를 드러내 보이듯 총알은 정확히 넬슨 록펠러의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총격 직후 25세의 여성 보좌관은 충격 속에 실신했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이 밝힌 나중의 보고에 따르자면 그녀는 격리되어 있으며, 사건에 관해 언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여자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안전이라는 걸 느낄 수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은폐 노력은 계속되었으며, 새로운 의문들과 너무나도 명백한 불일치들은 커져만 갔습니다. 예를 들어, 록펠러 가문의 대변인인 휴 모로우는 거의 2일 동안, 넬슨 록펠러 사망 당시 곁에 있던 여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지는 이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 “어제 AP 통신의 보도에 따르자면, 토요일 새벽 4시, 넬슨 록펠러가 사망한지 채 5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AP 통신의 기자 가운데 한 명이 마르셱양이 록펠러 가문에 의해 고용되기 직전 워싱턴에서 라디오 AP 통신 기자로 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죽음에 관한 라디오 보도를 따기 위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 모로우 대변인이 그녀의 아파트에 그녀와 함께 있었으며, 둘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AP 통신으로부터 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모로우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 “마르셱양이 새벽 4시에 무슨 이야기를 했건 간에, 나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이미 수 차례에 걸쳐 이야기했고, 이젠 지쳤습니다.”

 

남아 있는 두 명의 형제들인 로렌스 록펠러와 데이비드 록펠러가 넬슨 록펠러 사망에 관한 진실을 일반인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위기의 시기에 이를 알릴 경우 분명코 너무나도 많은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 때는 정말로 ‘위기의 시기[CRITICAL Time]’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권력은 항상 자선 활동이라는 가짜 후광 효과로 가장 잘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넬슨 록펠러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경우, 자신들의 평온한 이미지는 그 뿌리부터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넬슨 록펠러 머리에 난 끔찍한 상처는 화장을 통해 영원히 감춰져야만 했습니다. 록펠러 가문이 통제하고 있는 의료 독점 시스템으로부터 사인이 심장마비임을 입증해 줄 수 있는 가짜 서류들을 구비하여 서둘러 일을 마무리해야 했던 것입니다.

 

한 때 4명의 록펠러 형제들로 구성되었던 강력한 권력은 이제 심각하게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데이비드 록펠러와 로렌스 록펠러는 자신들의 가문 관계자들 가운데 넬슨 록펠러의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절박하게 필요로 했습니다--그런데 이 일이 발생하자마자, 넬슨 록펠러의 권력을 제대로 승계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이미 가까이 있었고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넬슨 록펠러가 살해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도 그와 함께 있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는 당시 미국이 경험했던 끔찍한 ‘정보 격차’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록펠러 가문의 하수인이자,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작은 히틀러”이기도 했습니다--오 당신들은 이미 눈치챘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였습니다!!!!

 

우리는 다음 번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은행가들이 담보권을 근거로 많은 사람들의 목장을 강탈해 가곤 했던 시기로 다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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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5권, “Rape of The Constitution ; Death of Freedom” 제 7-9장, pp. 68-84

 

 

http://phoenixarchives.com

 

https://truthinlight.tistory.com

 

 

[추가 번역 예정--phoen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