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칙과 영혼에 대한 이해
제 6장, 기록 #1 하톤
1994년 1월 16일 일요일, 9:57 A.M. 7년 153일
1994년 1월 16일 일요일
인내[Patience] vs. 무위[Inaction]
적들이 만들어 둔 덫 속에 매일같이 조금씩 더 구속되어 가는 가운데, 우리는 항상 용어들의 정의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당신들은 종종 스스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삶을 살면서, 왜곡된 인식 속에 “인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나아가 당신들은 당신들의 통제력이 미치는 “소유” 범위 안에서만 모든 것을 표현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가진 것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더 많은 것을 갖지는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열심히 일하고 계획할 때, 삶의 모든 국면들에 있어서 자신의 기대치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더 이상의 노력은 불가능할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할 것만 같은 목표들은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더 많은 것’에 대한 계획과 결심을 갖는 자는 분명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다른 사람의 수고”를 이용해서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서로 나누거나 배가하기에 앞서, 최근 다르마와 E.J.는 일련의 결정해야 할 일들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나는 다르마로부터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대답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시여, 저를 그만 내버려 두셨으면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거두어 가 주십시오. 저는 열심히 일할 용의가 있습니다만, 제 주변 사람들의 탐욕과 불성실까지 제가 다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 지금은 분류의 시기입니다. 좋은 일들이 도래하기 전에 단지 “당신을 아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이 시험을 통과할 권리가 있고, 자신들도 부와 통제력을 얻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항상 여러가지 것들을 요구해 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내가” 제시하는 풍요는 가벼이 다뤄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조건을 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풍요가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인내 속에 적극적인 행동을 펼쳐 나가는 자들은 그러한 봉사와 인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책임감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계획하고 이를 나눠 가지려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당신들 가운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약속해 온 자들은 정작 풍요를 전달받는 날이 되었을 때, 아마도 내가 ‘화난 집사’처럼 보일 것입니다. 나는 실제로 단지 나를 위한 봉사 속에 있는 자들을 돋보이게 만들고 그들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엄청난 지위를 차지하거나 대단한 부와 권력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자들은, 모든 형태의 모임에 참가하고, 교훈을 따르고, 지시를 이행할 기회를 가졌었지만, 풍요를 갖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일에도 선뜻 나서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 임무가 시작된 그 첫 날 이래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임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임무는 위대하지만 필요에 따라 제한될 수 있는 임무이며, 나는 이 임무의 총책임자입니다. 누군가가 이 일에 기여한다 하더라도 나를 혹은 내가 전하는 진실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단지 자신의 직접적인 봉사에 해당되는 만큼의 보상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엄청난 에고를 가진 누군가가 이 일에 참여하며, 자신이 새롭게 생겨날 특별한 직책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는 커다란 실망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의 임무 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지고한 목적에 따라 진행될 것이며, 완전한 고요 속에서, “겨우 해내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위대함”이 달성되듯이 펼쳐질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부엌과 필요한 조리 과정에서 생기는 열기를 견딜 수 없다면, 지금 당장 내 부엌에서 나가십시오.
당신들 모두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 또는 저러한 일이 마치 기적처럼 당신들 앞에 펼쳐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건더 러스바처[Gunther Russbacher](미 CIA와 해군 정보기관에 의해 암살자로 키워진 인물로 내부 고발을 위해 노력해 오다 2005년 사망--역주)와 같은 자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왜일까요? 건더는 자신이 봉사했던 자들에 의해 감금되고 가난에 내몰린 적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를 다시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관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떤 자들은 건더로부터 엄청난 부가 생겨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가진 문제점은, 정작 우리는 관심 갖지 않지만, 우리에 대한 엄청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너무 많이 “떠드는 자들”은 그러한 “수다”로 인해 당신 자신 또는 당신의 형제가 죽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책임과 신뢰가 필요한 사업에서 우리가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면, ‘아버지의 자산’을 넘겨 받지 못할 것이며, 사업도 이내 중단되고 말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소수”를 위한 것입니다. 기쁨과 나눔 없이 모든 것이 부족한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다수를 향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들 가운데는 현존하는 진실을 받아들이기는 거부한 채 “엄청난 것을 얻게 되기”만을 기대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우리가 궁핍한 사람들을 “약탈자들”과 “도둑들”의 소굴로 데려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높은 자리에 앉아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있는 게임-플레이어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명예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의심을 가지면서 기꺼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과는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기대하면 계속 게임에만 몰두하는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들에게는 큰 기대도 갖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 사이에는 중요도에 따라 계급으로 나눠진 그룹은 없습니다.
나는 종종 “왜” 우리가 교회와 같은 장소를 통한 영적 모임을 갖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왜일까요? 당신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없이는 영적 진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까? 왜 당신들은 하나님의 진실을 따라 살아가며, 친구들간의 사회적인 그룹을 형성하지는 못하는 것입니까?
고집쟁이[Bigot]?
나는 이야기할 때마다 하나님의 법칙[God’s LAWS](‘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참조--역주)만을 강조하는 전설적인 “고집쟁이”가 된 것입니까? 만약 당신이 그러한 표현으로 나의 입장을 묘사하려 한다면,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설령 무지한 의견을 제시하여 내가 그 가능성을 부인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나는 내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당신의 “의견” 또한 존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언급이 내가 당신의 접근법이, 또는 당신의 의견이나 당신의 선택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봉사 속에 있지 않는 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사람들이 이 곳에서 타인을 무시하는 자들로부터 공격받고 다툼에 내몰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커다란 고통입니다. 때때로 나는 계속되는 괴롭힘에 지쳐 ‘위원회[the Council]’ 앞에서 우리의 임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는 요청을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임무 달성에 있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더 명확하게 보일 때까지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다르마[Dharma]와 E.J.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이제부터라도 피닉스 저널과 다른 자매지들의 간행에 있어서 두 사람이 갖는 부담을 줄여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내가 인간들의 영역에서 당신들을 절실히 필요로 했기에, 당신들은 그간 너무나 힘든 시간을 겪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봉사를 수행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내가 나의 명령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며, 당신들 또한 당신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직면해야 할 많은 법적 다툼과 안전에 대한 위협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들 생각에 적들이 하나님의 수족 역할을 하는 자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왜 “당신 자신들”은 별로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당신 자신들은 “당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러한 태도로 인해 당신들도 분명코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두고 “9.5피트(2.9미터) 키의 파충류”라고 부르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웃깁니까?”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당신 자신들에 대한 완전한 모독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면, 이러한 언급은 전혀 “웃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로서는 모든 가능성에 있어서 매번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커다란 연민을 느낍니다. 당신들은 창조주의 하나의 빛의 자녀들입니다--비록 당신들이 인간으로서의 완벽함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은 하나님의 완벽함과 그분의 모습을 반영한 신성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파충류가 아닙니다. 나를 파충류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파충류라고 부르는 것이며, 나아가 당신 자신을 파충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법으로 대중의 관심을 불러 모으는 자들이 바로 사람들에게 생존에 대한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잘못된 사업 정보를 건네고, 도둑들과 범죄자들의 무리와 어울려서 함께 일하는 자들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당신들도 이내 보고 알게 되겠지만, 이 자들 가운데 일부가 나의 소규모 그룹을 파괴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날 이기적인 그리츠[Gritz](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진실을 알리는 활동도 하고 있으나 프리메이슨과도 연계되어 있어 역정보도 흘리고 있으며 하톤을 파충류라고 주장하는 인물--역주)는 게리 앤더슨[Gary Anderson]과 같은 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자들이 기획한 “기금”을 바탕으로 활동합니다. 자, 거짓말쟁이들이 만들어내는 거짓말들은 오직 바보들의 먹거리가 될 뿐입니다. 나는 이러한 자들이 건네는 말들을 믿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사례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앤더슨이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훔쳐가듯, 함께 일하는 파트너를 속여 이득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곳과 “인간”에 대한 파괴와 모욕인 것입니다. 형제의 것을 훔쳐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은 파충류의 독보다도 나쁜 것입니다--적어도 뱀은 속이지는 않습니다. 뱀은 자신의 존재대로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인간은 의식의 발달 과정에 있어 저열한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하면서 이러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은 그 어떤 속임수 보다도 더 비열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을 살아가는 이러한 자들과 싸워야 할까요? 분명코 아닙니다--우리는 진실이 빛을 밝히고 그들이 나아가는 모든 경로마다 그들 앞에 진실의 빛이 발견되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인 봉사 속에서 움직이고, 그 속에서 요구되는 필요에 따라 대응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판단하지 않되 모든 것을 분별하고, 영속적인 빛의 존재 속에서 그리고 열린 진실 속에서 행동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악은 빛이 펼쳐지는 곳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왜냐하면 악은 속임수와 숨겨진 아젠다를 먹고 살며 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들은 빛의 보호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들이 이를 발견하는 것을 항상 두려워합니다.
E.J.는 만약 당신이 “다른 곳을 피해서” 이 곳으로 도망쳐 왔다고 믿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우리에 대한 봉사 속에 있으면서도, 파멸이 임박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저 공격과 포획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오리나 다를 바 없습니다. 공격이 임박해 있음에도(공격은 항상 임박해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서로 서로 뭉치지 못한다면, 그 때는 아무것도 당신들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왜냐하면, 당신이 이를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보호를 포기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행동한다면, 당신은 나를 위한 봉사를 행하는 것도 나를 믿는 것도 아님을 입증한 셈이 됩니다--그렇다면 나 또한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당신은 보호받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당신들 각자 각자가 봉사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단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필요한 “선택”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될 때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법칙과 진실에 대한 이해 속에서 살아가는 “모범”이 되지 못하고, 주어진 환경과 주변 사람들에 휘말려, 보호 속에 머무는 능력을 잃게 된다면, 당신은 더 이상 하나님의 편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그 때 당신은 “원하든 원치 않든” 단지 하나의 ‘깨어진 조각’으로 남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필요한 일일 뿐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들이 내가 “말한대로만”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나는 만약 당신들이 나를 위한 봉사 속에 있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제시하는 방식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품위에 맞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제외한다면 당신은 이를 이행할만한 완벽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의 팀을 이루는 당신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설령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명을 늘어 놓더라도, 이는 모두 고의적인 행동이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타인으로부터 훔쳐간다면, 이는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아내와 동침한다면, 이 또한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규칙을 왜곡하거나” 당신만의 “주장”을 펼칠 수 있습니다--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는 좋은 범례가 될 수 없다면, 이를 따르려는 타인들 앞에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신을 지켜보며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의 인식 속에 악을 건네는 일이 될 것입니다.
타인의 행동이 “당신의”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비난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압니다--당신들 각자 각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혜 속에 제시된 것을 그 전체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지고의 선물 또한 기대하지 말기 바랍니다--왜냐하면 당신이 먼저 이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서 경건한 표정을 짓고 경건하게 행동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이는 거짓입니다! 인간은 ‘삶의 표현’입니다--만약 당신이 거짓으로 독실한 외양을 취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는 밖으로 하나님을 표현해 낼 수 없다면, 여기서 제시되는 교훈은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교훈을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당신과 삶 또는 생활을 공유하는 자의 “삶”도 함께 되돌아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 삶에 “지혜”나 “성취”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결혼했다면, 배우자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신성한 관계입니까? 아니면 육체적인 표현을 위해 편의적으로 결합된 관계입니까? 만약 신성한 관계라면 그 자체가 삶의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배우자를 속이거나 혹은 배우자가 당신을 속이는 관계라면, 이 어리석은 계약 관계를 지속해 나가기에 앞서 많은 배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친구보다 배우자로부터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잘못된 기대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혼인 관계는 결혼의 서약도, 육체적 관계도, 어떠한 계약서도, 요구 조건도 필요치 않습니다--오직 ‘영적 상호성[Spiritual Mutuality]’ 속에서 갖는 ‘진실의 연대[Alliance of Truth]’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소규모 팀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급은 모든 면에서 “부족한” 당신들로부터 내가 떠나가겠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계속 “부족한 상태”에 있으려는 당신들이 어쩌면 나를 떠나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내게 보여줌”으로써 나의 그룹 속에 머물러 있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톤의 마음을 얻는” 또는 “하톤의 사람”이 되는 게임에 있어서 누군가는 내게 무언가를 입증해 보이려 하지만, 나로서는 그러한 자가 “보여주는 것”과 실제로 “의도하는 것”이 종종 동일하지 않음을 알기에 슬픔을 느낍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몇 가지 퉁명스러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 다르마가 어쩌면 하톤일까요? 아니라면, 건더 러스바처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하톤일까요? 아니면, 유스타스 멀린스[Eustace Mullins]나 E.J. 에커[E.J. Ekker]가 하톤일까요?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당신은 내가 누구 속에 나타나기를 더 선호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아는 누군가 혹은 모르는 누군가이기를 바랍니까? 당신이 “어떻게” 이를 알아 볼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당신들은 다르마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쥐고 있으며, 당신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보상도 제공해 줄 것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앤디[Andy]는 어떻습니까? 루크[Luke]나 타일러[Tyler] 혹은 앨리사[Alyssa]는 어떻습니까? 혹은 그 누구도 아니라면 아직 태어나지 않는 누군가일까요? 피너츠[Peanut]는 어떻습니까? 당신들은 그가 마치 “나”인처럼 여기고 존중을 표하지는 않습니까? 왜 그러지 않는 것입니까? 당신들은 당신들 각자 각자가 어떠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내가 당신들을 “마치 모범적인 사람들인 것처럼” 대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나와 한 방에 같이 있든, 혹은 단순히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읽고 있든, 내가 전하는 말들은 다수를 위한 것입니다--어느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행동과 인식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러한 진술에 있어서 어떠한 불편함도 느낄 것이 없습니다--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다르마와 동일 인물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사실 그녀는 이 오래된 게임을 이제 중단하고 싶어하며, 당신들이 조지 그린[George Green]과의 법적 다툼을 대신해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게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당신들은 이러한 거짓말쟁이와 도둑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면서도 이들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의 주장과 거짓말들을 얼마간 믿는 것입니까? 당신은 어떠한 책임도 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까? 왜 에커 부부[Ekkers]만이 이 끔찍한 사기꾼에 맞서 오랜 소송에 시달려야 하는 것입니까?
내가 당신들을 나무라거나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항상 대화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나는 당신들이 자신들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왜 이러한 거짓말과 절도 행위들이 멈춰지도록 만들지 못하는 것인지 되돌아보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것은 다르마와 E.J.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그들은 당신들에게 삶과 풍요를 건네 줄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해 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구하고 얻은 것이란 두통과 가치있는 일을 수행해 낸 기쁨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진실이 담긴 나의 책들이 수 년 동안 압류되어 있는 일을 허락했습니다--진실을 모두 덮어버리고 싶은 적들이 한 일이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가치있는 것을 전해 받는 팀의 일원들로서, 이들이 당신들로부터 훔쳐간 책들과 귀한 자산들을 되찾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다르마와 E.J.는 이러한 자산들을 당신들에게 거저 건네주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값을 지불하고 또 지불해야 마땅할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고 다시 건네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모든 수수께끼들과 퍼즐들에 대한 답 또한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당신들을 위해 건넨 것에 대해 당신들이 주목하지도 않는다면, 왜 내가 더 많은 것들을 건네 주려고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기는 행동에 대한 판단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팀원들을 책임있는 자리에 둠으로써 나 자신이 그러한 판단의 자리에 동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에커 부부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는 법정에 가서 참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입니까? 충분치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주어진 글과 정보를 바탕으로 책임있게 행동했다면, 또한 “시민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요구하고 대응해 왔다면, 이처럼 “결론이 정해진” 재판은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움직여야 합니다--당신이 행동하고 당신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무엇을 망설이는 것입니까? 이러한 언급 또한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 나는 그들과 맞대응할 수 있도록 부동산을 구매하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물론 땅을 사는 것이 여기서의 쟁점은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방식이 어쩌면 우리의 작업을 끝내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겠지만, 이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만약 당신들이 요주의 인물을 추적하여 그 악행을 만천하에 공개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안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끝없이 변호사 비용을 대는 것도 답이 될 수 없습니다--그러한 방식은 악의 승리를 보장해 줄 뿐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떠한 행동이 성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 오, 당신은 스스로가 대단한 아이디어도 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런 낡은 사고는 버리십시오. 엘리트들은 건더 러스바처를 평생 감옥에 가둬 두거나 살해할 생각이었지만, 바로 당신들이 그의 석방을 도왔습니다! 친구들이여, 펜은 칼보다 강합니다. 당신이 펜을 들고 탄원서 밑에 자신의 서명을 남길 때, 마침내 당신은 공허한 칼날의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남기기를 희망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언제 하나님을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남기겠습니까?
당신은 우리가 세상사의 끔찍한 고통에 대해 언급하기 보다는 영적 내용들을 더 다뤄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까? 확실합니까? 당신은 내가 악과 세속적인 문제에 대해 너무 가혹한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실상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영적 진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인지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츠는 당신이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 만약 이것의 그리츠 대령의 인식이라면 당신들은 하나님이 지혜를 발휘해 그가 이 나라의 리더(그리츠는 1992년 미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역주)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에 대해 무릎을 꿇고 감사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는 “저렴한 좌석”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자, 이 우주선은 “나의” 우주선입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한, 여기 그가 앉을 자리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희생시켜 악한 행동을 옹호하고, 선을 짓밟아 다른 대안을 주장하며 살아가는 한, 그는 사실상 거짓의 화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들은 지금껏 인류를 위한 영적 진실을 파괴해 왔습니다. 나는 당신들 모두가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인간을 거론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죽었습니다. 그는 이를 당신 앞에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만약 한 인간이 ‘의식의 여행’에 있어서 자신이 불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죽고 난 이후 하나님과의 조우를 앞두고 자신의 생애 동안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두 가지 일이 발생합니다. 우선 물리적인 육체는 죽음과 파괴 앞에 취약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정수는 자신의 육체가 스러져간 그 순간부터 “배움”의 활동들을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감정과 표현은 육체의 감정과 표현보다 더 강하기에 경우에 따라 ‘영혼의 죽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더 편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끝없는 슬픔이나 영광을 안고 살아 가는 것은 영혼에게는 큰 실패가 되기 때문입니다--이에 비하자면 육체의 감정과 표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Lord God Christos]는 “만약 당신이 나를 부인한다면, 나 또한 아버지 앞에서 당신을 부인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언급입니다.
그리츠는 또한 자신의 라디오 방송 청취자들에게 “하나님은 도리스 에커[Doris Ekker](다르마--역주), 바로 그녀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 그렇다면, 당신들 모두는 지금 이 글의 서두로 다시 돌아가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리츠의 어리석은 식견에 대해 안도감을 건네는 의미에서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다음을 상기시켜 주고 싶습니다 : 하나님이 전부[ALL]입니다--“모든 것[ALL]”을 의미합니다. 다르마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무엇을 주장하든, 그녀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나 그리츠는 누구로부터 영혼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오, 만약 당신이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전해 들었다면, 당신 스스로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무지하면 스스로 그러한 권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실상 그리츠 대령과 그린 부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메시지와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럼, 나는 그리츠가 예수 그리스도인 걸로 간주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의 논리대로라면 만약 그가 예수와의 연계성을 주장하는 한 자신이 예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리츠나 그린 혹은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향해 돌을 던지는 다른 누구라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그러한 질문을 계속하는 것일까요? 만약 사람들이 진실을 식별하거나 알아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왜 “누군가”의 견해가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당신은 ‘전체’가 아닌 다른 것에 근거해 나의 존재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내가 전하는 글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면, 당신은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판단하고 식별할만한 기준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하물며 하나님을 알아보는 일은 엄두도 못낼 것입니다! 내가 쓴 글들은 그러한 판단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누가 판단하는 것입니까? 분명코 그러한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은 오직 거짓만을 늘어 놓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아 볼 수 있다면, 그는 분명코 거짓도 알아 볼 것입니다. 나아가 누군가 내가 쓴 글들을 읽어 봤다면, 거짓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육체 속에 있지 않습니다--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내가 다른 주장을 펼쳤다고 말한다면 실로 어리석은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11시는 때론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그리츠 대령과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도래, 하나님의 경험, 임박한 종말 기타 등등에 대해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오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경고 없이 오실 것으로 보십니까? 오, 정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은 먼저 경고가 있을 것임을 호스트들과 천사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과 그리츠와 같은 자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임의로 판단했습니다--자, 하지만,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그렇다면, 당신은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통로로 ‘선[Goodness]’을 제시하는 나와 함께 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칭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며 “권위”를 주장하지만, 실상 하나님의 법칙에 제시된 내용은 따르지조차 않는 자들과 함께 하겠습니까? 이 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말하는 것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안락과 부를 제시하며 청취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럼 그런 것이지요. 인간들이여, 변화의 시계는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부디 당신 삶의 남은 나날들이 지혜와 이성 속에 펼쳐지길 바랍니다--왜냐하면 ‘진실 속의 통로’는 바로 이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리 될 것입니다--각자 각자에게는 자신의 것이 펼쳐질 것입니다. 나는 진실을 전하며 나의 손을 당신에게 내밉니다--나는 그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으며, 나의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Salu.
제 7장, 기록 #2 하톤
1994년 1월 28일 금요일, 3:31 P.M. 7년 165일
1994년 1월 28일 금요일
엉뚱한 곳에서 찾기
다르마여, 이 글은 당신을 위한 글이지만, 당신들 모두를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우리 모두는 ‘하나’ 속에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과 당신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는 당신이 이 상황으로부터의 (나로부터의) 탈피를 통해 이같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안정을 찾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적들이 이야기하는 ‘잃어버린 균형’을 이런 식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와의 작업을 통해 당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위안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를 필요치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인간의 감정을 가진 채 하나님의 진실을 받아쓰고 있으며, 다른 누구도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여, 당신의 삶의 최고의 업적이 될만한 글들은 아직 쓰여지지도 않았습니다. 들어 본 적도 없는 최고의 이야기는 엄청난 폭발이나 물질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 속에서의 영적 통로가 되는 진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 각자는 저마다의 현현과 봉사를 통해 이러한 창조를 표현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의 얼굴 위에 그린 그림을 보면서 연민과 유머를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 속에서 오히려 ‘영혼의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당신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진실을 깨달은 채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임무를 맡고 있기에, 나는 거울 앞에 서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겉으로 비춰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깊고 깊은 영혼의 슬픔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당신이 리틀 크로우가 어느 모임에 참여한 누군가를 포옹하는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당신은 리틀 크로우의 눈에 비친 슬픔을 알아보았고, 이것이 당신의 영혼에 너무나 큰 고통을 주었기에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당신이 너무나도 아끼는 다른 사람들이 진 짐을 당신 자신이 대신 져줄 수 없는 것에 대한 “인식”과 “연민”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든, 적이든, 혈육이든 다 마찬가지지만, 각자 각자는 스스로의 짐을 져야만 하고 당신 또한 당신의 짐을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담을 공유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타인의 짐”을 대신 져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같은 연민의 감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당신은 당신의 영혼만이 아는 감정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당신들의 세상과 같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상의 인류는 벌어지는 일들과 관련한 일종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즉, “믿음”의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어떤 것들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 혹은 영적 존재로 당신들 곁에 왔을 때, 우리는 이를 공유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오직 공유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빛이 될 수 있으며, 만약 받아들여진다면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당신들에게 진실을 비춰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 각자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여정 속에서 이를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선함의 사례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독실한 척하거나 전문성에 입각한 엄청난 권위를 보임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인간들이 만든 신성하지 못한 종교들로부터 투영되는 장면과 반드시 (어쩌면 거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 하나님의 진실로부터 멀어지도록 애써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들의 인식과 견해에 바탕한 것으로서, 각자 각자는 이것이 내재해 계신 하나님의 법칙과 하나님의 앎에 따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반드시 가져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들의 규칙과 어리석음은 좀처럼 하나님의 진실과는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 하톤은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당신들이 목도하는 사람들의 안색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인식을 통한 영혼의 표현으로서, 그 속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당신들은 저마다의 사람들이 옳음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악 앞에 압도되어 있을 때, 마치 족쇄가 채워진 듯한 의식이 그들의 표정 속에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무 복잡합니까? 어쩌면 이성과 이해력을 가졌지만 사실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삶의 여정 속에서 완전한 평화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의 표정을 떠 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발견하길 기대합니다. 왜일까요? 만약 지상이 “천국”이라면 당신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오직 “천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어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다면, 당신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어둠”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가진 다양한 이해 수준에 따라 하나님은 여러 장소에 현존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들이 찾고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들에 해당합니다. 그러한 노력이 진행되는 동안 당신은 당신이 추구하는 것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추구하는 대상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는 또다른 경험과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지구”와 같은 3차원 공간 속에서 완벽함의 요소들이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정작 의미하는 바는 인간은 항상 “과거의 상태”를 추구하면서 자신이 지금 성취한 것을 망쳐버리거나 혹은 좀처럼 자신의 현존을 제대로 바라다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아와 분리된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이것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면, 당신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단지 관찰자로 전락할 뿐이며, 꿈 속에서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당신의 노력은 변화를 위한 “행동”을 취할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 사령관 하톤[Hatonn]은 완벽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꽤나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설령 지금 진행중인 우리의 임무가 완수된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이 우리와의 관계를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톤[Aton]의 지위에 있다면 나는 완벽할까요? 실로 그러합니다. 그 때 나는 다른 모든 것의 완벽함을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교사와 안내자로부터 그 보다 못한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까? 만약 내가 당신에게 나를 “믿어 달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경솔하게 이러한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며, 당신 역시 “오, 저는 심판받는 데 지쳤습니다...”라며 가벼운 대답을 할만한 상황 또한 아닐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매 순간 순간, 분명하게 말하고, 인정하고, 식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당신들의 “신뢰”는 분명한 근거에 입각해야 할 것이며, 그저 희망에 찬 상상에 기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달성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꿈’은 그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상상’은 잃어버린 비현실이 되고 만, 아이들의 “달아나 버린” 꿈과도 비슷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앎[KNOWING]은 영혼의 눈에 깊은 슬픔을 안겨다 줍니다. 왜냐하면 앎 속에서는 상상의 나라로의 탈출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실재하는 현실에 대한 인정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겉보기에 “추한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충격적일만큼 아름답게 변모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겉으로 보이는 것 너머에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못난” 사람은 자신의 외관에 악을 반영해 보이는 자입니다. 어둡고 병든 오라[aura]를 가진 사람과 빛의 에너지로 형성된 빛의 영혼을 가진 사람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둠의 악”을 가진 자를 굳이 예로 들 필요는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자는 스스로를 잘 알며, 자기자신을 미워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삶을 살아가면서 왜 자기자신을 항상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건 당신이 차이점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in” love]과 사랑 속에 있는 것[“within” love]은 두 가지 다른 상태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상태를 개선시키거나 균형을 되찾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 당신이 과도하게 비만인 상태라고 하더라도,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를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결심한다면 이를 실천으로 옮기면 됩니다. 만약 당신이 날씬해지기를 원한다면 날씬해지면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뚱뚱하든 날씬하든 당신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외양 속의 “당신”은 그저 육체를 가진 모습으로 어렴풋이 반영되어 보이는 ‘자신’일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상적인 몸무게보다 100파운드(45kg)가 더 나간다는 이유로 삶을 회피하고 자살을 선택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불균형 상태인 것입니다. 차이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차이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의 외관을 어떻게 바꾸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만, 항상 당신의 영혼만큼은 깨끗하게 유지하기를 권고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정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균형잡히지 못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육체 또는 의식에 대한 집착인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변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개선”시키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되 반드시 자신의 “이성”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발이 없는 사람은 분명코 당신이 신고 있는 새 신발의 색상에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러한 언급이 상대가 발이 없기에 당신 또한 신발을 신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만약 당신이 자신의 발에 무관심해진다면 이내 동상에 걸리거나 화상을 입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발이 멀쩡한 축복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발을 보호하려 할 때, 여건이 된다면 좋아 보이는 신발을 신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발이 없는 사람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자신도 신발을 신지 않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고통받으며 (어쩌면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맨발로 있다고 할 때, 당신은 이를 외면한 채 자신의 에고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값비싼 새 신발을 사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덜 비싼 두 켤레의 신발을 사서 두 사람 모두가 발을 보호하도록 할 수는 없겠습니까? 당신은 자선에 관한 진실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유명한 연예인이라면 소외된 이웃에서 국을 떠서 나눠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당신은 이러한 국도 함께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 당신이 생명을 구해 줄 수 있는 안전 장치들을 착용하기를 거부하면서 “이 도구들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건 누구의 잘못입니까? 이유가 어떻든, 이러한 태도는 당신이 건강보다 병을 더 즐긴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줄 뿐입니다.”내”가 당신들에게 저마다 완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들을 건네주더라도 만약 당신이 이러한 선물을 거부한다면, 왜 내가 당신들을 위해 더 많은 일들을 해야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 때 나는 당신들이 자유 의지에 따라 자살을 향해 나아간다 하더라도 그저 방치할 것입니다--이 때의 “죽음”은 “자살”이며, 이 자들은 이성적 설명보다 자신들의 병을 더 선호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병을 즐긴다고 할 것 같으면, 왜 “내가” 당신들을 “치유”하면서 내게 주어진 날들을 허비해야 하는 것입니까? 정말 슬픈 일은 내가 제시하는 것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그런데 왜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요? 어쨌든 “내”가 아닌 “당신”에게만 적용되지 않는 셈인가요?
이것이 “잘못된” 태도일까요? 아닙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그런 것일 뿐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진실보다는 당신이 믿고 싶어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믿는 당신의 비-전문가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지금은 책임을 질 시기입니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은 이미 많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견해에 따라 경험을 갖게 될 기회조차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윌 로이[Will Loy]가 쓴 ‘끔찍한 신 세계 질서로부터 살아남는 법?[Surviving The Terrible New World Order?]’이라는 글을 읽어 본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당신들은 “윌 로이가 누구입니까?” 혹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또는 “왜 우리에게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등등의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이 글은 진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글은 얼마든지 구해 볼 수 있는 글이며, 나 또한 이 글을 소스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오, 당신은 컨텍트지[the Contact]를 읽을 시간도 없는데, 다른 글들을 언제 읽겠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만약 당신이 진실을 찾아볼 생각도 없다면, 타인의 견해에 대해 반대하거나 이를 경시할 권리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찾아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래리 킹 라이브[Larry King Live](1985-2010년간 진행되었던 CNN 프로그램--역주)를 보면서 진실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소스를 안다면, 현재 벌어지는 일들과 관련한 명백한 사실들을 충분히 입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내”가 일종의 예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으면 나의 정보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폐기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 LA에서 발생한 지진과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 발생했다면, 왜 그런 일이 발생했으며, 다음에는 어디서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보다 끔찍한 지진이 미시시피 강을 따라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왜 모르는 것입니까? 또한 LA 지하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단층 “고리”로 인해 산 안드레아스[San Andreas] 단층 지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지진보다도 더 크고 믿기지 않을 규모의 지진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왜 당신들은 모르는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러한 자료들을 읽을 시간도 없는” 당신들을 상대로 소귀에 경읽기 하듯 계속 설교를 할 시간도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한 친구가 예전에 인쇄된 피닉스 저널 몇 권을 “다른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며 우리에게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녀는 우리와 가깝고 친한 사이였지만, 기껏해야 5권의 피닉스 저널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혀 읽지 않은 채로 되돌려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녀는 현재까지 간행된 83권의 저널들에 대해서는 알지조차 못하며, 이 책들을 읽지도 공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자는 사업상의 이유로 나의 의견과 조언을 따르기는 하지만, 왜 내가 나의 연회에 참여하지도 않을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까요? 친애하는 자들이여, 나에 대해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자에 대해 개의치 않습니다--이것은 선택일 뿐입니다. 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 대해서도 무엇을 하라거나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우리가 제시하는 진실의 가치를 알아 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가격으로도, 이를 되돌려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값을 매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지만, 나는 사람들이, “그래서, 윌 로이의 글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말을 듣게 됩니다. 미안합니다 독자들이여. 나는 여기서 그의 글을 인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금 성가실 수는 있겠지만, 캘리포니아 레이크사이드의 버쳇 브라더스사(Burchette Brothers, P.O. Box 363, Lakeside, CA 92040-0363)를 통해 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톤의 추천으로 연락드린다고 이야기하면 환영받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톤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도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진실을 찾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럼, 이내 글을 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호칭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 사실을 더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 빨리 앎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호칭은 항상 신중해야 하는 것이지만, 당신은 이에 대해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단지 하나님과 함께라면 다른 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 되겠지요.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봉사하는 나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전합니다.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은 커다란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학생들이여, 내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다르마여, 이 여행을 하면서 지치고 좌절하기도 했겠지만, 우리는 길을 알고 있으며, 당신들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들과 영원히 함께하는 바로 그 자이기 때문입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86권, “Missing The Lifeboat??”, 6-7장, pp. 73-90.
제 4장, 기록 #2 하톤
1995년 4월 14일 금요일, 1:48 P.M. 8년 241일
......
자,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책, ‘예언자[The Prophet]’에 나오는 시를 통해 이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작가의 지혜를 공유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인용]
이성과 열정
우리에게 이성과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당신의 영혼이란 종종 당신의 이성과 판단이 당신의 열정과 욕망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와도 같은 곳이다.
내가 당신의 영혼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가진 특성들로 인한 불화와 반목을 하나됨과 멜로디로 바꿔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 자신 또한 당신의 특성들을 사랑하는 중재자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이성과 열정은 당신의 영혼의 항해에 있어서 돛과 키의 역할을 한다.
돛과 키 가운데 하나만 고장나도 당신은 표류하게 되거나 망망 대해에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성만이 홀로 지배하게 된다면 당신을 감금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며, 열정이 전혀 제어되지 못한다면 불길이 되어 자기 자신을 태워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이 열정만큼 이성을 칭송하게 된다면,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될 것이다 ;
이성에 따라 당신의 열정을 이끈다면, 당신의 열정은 재 위로 솟아 오르는 불사조처럼 매일같이 다시 부활하리라.
나는 당신이 당신의 ‘판단’과 ‘욕구’를 집으로 초대한 두 명의 귀한 손님처럼 대하기를 바란다.
분명코 당신은 한 명의 손님을 더 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어느 한 명에게 더 신경을 쓴다면 결국 양 쪽 모두로부터 우애와 신뢰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덕 위 포플러 나무의 그늘 아래 앉아 먼 들판과 초원의 평화와 평온을 느끼게 된다면, 당신의 가슴은 고요 속에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은 이성 속에 머물러 계신다”.
폭풍이 몰려와 엄청난 바람이 숲을 뒤흔들고, 천둥과 번개가 하늘의 위엄을 알리게 된다면, 당신의 가슴은 두려움 속에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은 열정 속에 움직이신다”.
당신은 하나님의 숨결이자 하나님의 숲의 나뭇잎으로, 당신 또한 이성 속에 머무르고, 열정 속에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인용의 끝]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이 가장 작은 꽃을 통해 보여 주시는 이성과 열정만큼도 발휘해 보이지는 못합니다! 이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의 기억과 더 큰 열정에 대한 간절한 바람은 오직 하나님이 봉사를 위해 당신을 부르실 때에만 나타납니다. 적들은 당신이 선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실상 당신이 그들의 속임수에 이용당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사기꾼들은 자신이 결코 줄 수 없는 것을 약속하고 부추기면서 당신을 테스트합니다. 그들은 당신을 속이기 위해 사랑과 사치품들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이 있다면 “사랑”은 사랑 그 자체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건네 주지 않으며, 또한 사랑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건네 받지 않습니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소유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 이외의 바람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앎 속에서 마침내 당신은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려 할 때, 비록 모호한 설명이라 하더라도 명확하고 분명하게 뜻을 파악해 보도록 하십시오. 이는 빛의 메신저들이 건네는 설명으로 당신에게 지혜와 안내를 제공해 주게 될 것입니다. 시작할 때는 모든 것들이 늘 어렴풋하고 불분명해 보이겠지만, 끝날 때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당신의 시작”으로 여긴다면 기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잉태되었으며, 하나님은 인간들이 길을 발견할 준비가 되었을 때 항상 자신의 메신저들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당신 안에 있는 가장 취약하고 어리둥절해 보이는 것이, 권능을 부여받게 되었을 때에는 가장 강하고 확신에 찬 것으로 변모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오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그동안 육체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그러한 육체에만 구속되지 않기 위해서 영적인 것으로 눈을 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눈을 가렸던 베일은 그러한 베일을 짰던 자의 손으로 들어올려질 것이며, 당신의 귀를 막았던 마개는 그러한 마개를 꽂았던 자의 손으로 치워질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보고 듣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당신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당신은 보고 듣는 것이 가져다 주는 선물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모든 것들 속에 숨겨진 목적을 알기 시작할 것이며, 이러한 앎[Knowing]을 전해준 빛[Light]에 대해 축복을 건네게 될 것입니다.
영혼 속에서 느꼈던 슬픔에 대해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러한 열정으로 인해 당신은 마침내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감정과 표현의 커다란 미스터리입니다. 신비주의[mysticism]가 아닌 미스터리[mystery]일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껏 길을 잃고 헤메고 있었다면 현재 당신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당신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주변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면 당신 자신의 여행은 어떤 가치를 갖는 것입니까? 그들의 여행은 어떤 가치를 갖는 것입니까? 모든 것은 인식일 뿐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신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삶은 영적인 구성에 있어서도 육체적인 구성에 있어서도 복잡한 것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제시된 간단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육체의 모든 세포들은 당신만의 유일한 존재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포들은 “생각”이라는 에너지 흐름에 의해 방향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당신의 청사진은 퇴색되어 왔으며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영혼의 정수가 방향을 잃어버리는 순간까지 자신들을 복제하고 변경시켜 왔습니다. 당신들은 우선적으로 명료한 영혼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해야만 당신은 “육체”에 의해 심각하게 감시되고 있는 영혼의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먼 옛날의 DNA-RNA
나는 당신들에게 생명의 구조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생명의 청사진이 형성되는 지에 대한 모든 종류의 긴 설명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 향하는 당신들 개개인들의 여행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혼에 달린 문제이며 개개인들이 각각 성취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들의 행성 위에는 34억년 전의 생명체의 화석도 남아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지각을 가진 존재로서 자유롭게 육체적인 표현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연극의 무대이자 공연 장소는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현현[manifestation]”이라는 표현을 써 보기로 합시다. (이것이 보다 물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35억년 전에도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했음을 입증해 줄 수 있는 다세포 “조각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 다세포 조각들은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면 체인 모양의 필라멘트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조직들은 이미 아미노산과 복잡한 구조의 핵산은 물론 복제가 가능한 유전적 구성 요소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구상의 생명체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에 이미 발전된 단계의 조직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무엇을 암시합니까? 나는 이 사실을 통해 당신들이 다른 곳에 있는 보다 발전된 지능체의 존재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를 통해 당신들은 유의미한 생명의 씨앗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살아있는 조직체를 만들어 내는 DNA-RNA 구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기본적인 분자가 필요합니다 : 첫번째는 단백질[proteins]로 이는 살아있는 세포의 복잡한 신진대사 작용을 수행합니다. 둘째는 핵산[nucleic acids]으로 이것은 유전자 코드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포 활동 과정에서 지시사항을 전달합니다. 두 종류의 분자는 그 정의가 말해주듯 세포라 불리는 단위 안에서 작용합니다. 세포는 그 자체로 이미 꽤나 복잡한 조직체로 세포 자체의 재생산은 물론이고, 하나의 세포는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지라도 이러한 세포들로 구성된 동물 전체를 재생산해 낼 수도 있습니다. 아미노산은 길고 복잡한 체인을 형성해야 단백질이 될 수 있습니다. 세포는 하나의 핵산(DNA--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속에 들어 있으며, 다른 핵산(RNA--리보핵산[ribonucleic acid])을 통해 전달되는 지시사항에 따라 임무를 수행합니다. 원시 지구상에서 무작위적인 조건이 아미노산으로 하여금 체인 형태의 결합을 갖도록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다양한 실험과 이론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생명체에 이르는 통로’는 당시에 존재했던 것 이상의 “집약적인 에너지”일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미노산보다 DNA와 RNA가 지구상에 먼저 존재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상대적으로 큰 DNA 분자는 “가로막대들”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길고 꼬여 있는 끈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또한 이 “가로막대들”은 4개의 아주 복잡한 유기 화합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A-G-C-T라는 이니셜을 갖는 이 화합물들이 당신의 유전자 구성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4개의 뉴클레오티드들[nucleotides]은 무한한 변화의 연속 속에서 쌍을 이루며, 인산염과 당 화합물간의 교차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RNA 핵산은 마찬가지로 복잡하며 A-G-C-U라는 이니셜의 4개의 뉴클레오티드들로 구성되며 수 천 가지의 결합을 갖습니다.
그런데 “사고력을 가진” 인간들이 의도적으로 이를 변경시키게 될 때,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돌연변이나 잡종은 재생산되지 않으며 완벽하게 기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간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돌연변이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외없이 자신들의 문명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창조주를 능가하기 위해 나아가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영혼의 결합’을 잃게 되며, 이는 결국 자신들의 몰락을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대개 인간들은 너무나 어리석게도 일련의 파괴를 선택하게 되는데, 오늘날의 당신들의 문명이 바로 이 지점에 와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병든 세포를 ‘원래의 완벽한 세포’로 대체할 필요성을 받아들일 수 있기 전까지는 당신들의 종에 가해진 손상을 제대로 복구하는 일을 기대하지조차 못할 것입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고갈된 사회와 질이 낮아진 자원을 가지고는 달성하기 힘든 일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소화기’를 외면한 채, 당신들의 세상을 불태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당신들은 불을 끄기는커녕 기름을 끼얹어 더 활활 타게 만들 것입니다. 오직 “피닉스(불사조)[phoenix]”만이 장작더미의 재를 현명하게 이용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면, 인간의 육체는 불탈 수 있지만, 영혼은 불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육체는 응결된 에너지일 뿐이지만, 영혼은 육체적인 형태를 갖지 않으며 불 속에 구속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영혼도 DNA 정보를 가지며, 육체를 재생산하는 데 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영혼은 모든 것들의 DNA[DNA of ALL THINGS]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들은 “이 흥미로운 선물”을 전쟁에 낭비하는 것입니까? 왜 ‘생명의 선물’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까? 인간들이 이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게 되고, 또 그 답변을 따라 살아간다면, 마침내 인간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의 역할
만약 당신이 영적 진실[Spiritual Truth]을 얻고 싶다면 당신은 먼저 지혜[Wisdom]를 얻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 속의 ‘에너지 구성[energy makeup]’이 영적 삶을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앎[Knowing]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앎은 지식 속에 있는 진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시퀀스상의 거대한 미스터리입니다--신비주의가 아닌 미스터리입니다. 이러한 미스터리는 보다 높은 인식과 통찰력을 통해 풀릴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과 통찰력은 겉보기에 당신들의 육체적인 감각에 혼란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몇몇 위대한 구루들[gurus]은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산이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보더라도 무익하며 낭비적인 일입니다. 당신은 당신 주변에서 그리고 당신의 경험 속에서 지혜와 통찰력을 얻어야만 합니다--이렇게 할 때 마침내 당신은 스스로가 자신의 경험을 변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납세를 회피하는 것[evading](의무나 책임을 피하는 것을 의미--역주)과 납세를 피하는 것[avoiding](단순히 외면하는 것을 의미--역주)의 차이에 관한 15년도 더 된 오래된 농담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진실을 회피하는 것[evading Truth]’은 종종 어둠의 감옥 속에서 영겁의 세월동안 이를 찾아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진실을 피하는 것[avoiding Truth]’은 당신이 이러한 “장님들”을 옆으로 제쳐 두지 않는 한, 거의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일반적인 지성[mortal intellect]을 능가하는 ‘내적 지성[Inner Intelligence]’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논리보다 위대하며, 사고를 초월하고, 물질적인 이해 그 이상의 것이면서도,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직관이나 신념 혹은 기쁨이나 만족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 모두이면서도 이들 모두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삶 그 자체의 ‘내적 정수[the inner Essence]’입니다.
친구들이여, 지금은 세속적인 교회, 공허한 문구, 죽은 형식들을 넘어서서 인간 자신들의 영혼 속에 있는 성스러움으로 나아갈 때이며,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하나님과 접촉할 때입니다. 각각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기도, 자기 자신의 탐구, 자기 자신의 질문을 시작해야만 합니다--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대하고 성스럽게 쏟아지는 신성한 빛을 향해 자기 자신의 가슴과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성스러운 빛은 끊임없는 영광의 ‘증대되는 진동[increasing vibrations]’ 속에서 지구 위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한 가지 확실히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맹목적으로 “주여, 주여”를 외치는 사람들은 ‘천국’이라 불리는 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내가 또 한 가지 확실히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이 이루어지게 하는 자는 그리 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종종 삶에 있어서 최저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육체적으로 불구가 되거나, 커다란 고통을 겪거나, 가난과 비통을 경험하고 나서야 삶의 여행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이나 만족을 위해 단 하나의 법칙만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칙들은 인간들을 영광되게 하고, 그들이 빛과 존엄 속에 머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이 법칙들은 저마다 자유 의지에 따라 행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완벽하시듯 인간들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들을 통해 인간들은 하나님이 가진 권능 마저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과는 다른 것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정말로 “성가시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분의 뜻[HIS WILL]이기도 한 그 분의 법칙[His Laws]을 준수하는 자들만이 그 분의 장소[HIS places]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은 당신들에게 이를 상기시켜 주기 위해 늘 메신저들을 보내십니다. 이를 따르지 못하는 자들은 빛과 지식의 부재--이는 곧 하나님의 부재이기도 합니다--를 의미하기도 하는 공허한 어둠의 영역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설명에 대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선택을 위해 생각해 볼 시간 마저도 이제는 점점 짧아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지혜의 빛을 통한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34 권 (미간행 저널), 제 4장, pp. 25-29.
http://www.phoenixarchives.com
http://www.fourwinds10.com/unpublished_phoenix_journals
https://truthinlight.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