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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th in History

록펠러 카르텔의 활동과 영향력

by - phoenix - 2022. 10. 9.

제 9장, 기록 #1 하톤

1990년 5월 25일 금요일, 7:20 A.M. 3년 282일

 

......

 

봅시다, 어디까지 했습니까?

 

오, 그렇군요. 우리는 트로츠키가 러시아를 향해 떠나갈 때 록펠러가 여행 경비로 100,000 달러를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는 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1917년 4월 13일, 배가 캐나다 핼리팩스[Halifax]에 정박했을 때, 캐나다 비밀정보 요원들이 들이 닥쳐 즉시 트로츠키를 체포했으며 노바 스코시아[Nova Scotia]로 이송해 감금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졌으며, 몇몇 나라의 주요 관료들은 광분한 듯 트로츠키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캐나다 비밀정보국[The Secret Service]은 트로츠키가 러시아를 전쟁에서 구해내고, 더 많은 독일 군을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캐나다 군대와 대적하도록 만들기 위해 러시아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했습니다--오, 이건 지금 이 자리에서 다 다루기에는 너무 많은 음모에 관한 내용인가요?

 

영국 로이드 조지 총리[Prime Minister Lloyd George]는 서둘러 캐나다 비밀정보국에 연락을 취해 트로츠키를 즉각 석방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만, 캐나다 비밀정보국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결국 석방되었는데, 바로 록펠러가 가장 신뢰하던 하수인 가운데 하나였던 캐나다 맥킨지 킹[Mackenzie King] 노동장관(1921년 이후 세차례에 걸쳐 캐나다 총리 역임--역주)의 개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킹은 록펠러 가문을 위해 오랜 기간 “노동 분야 전문가”로서 자문을 제공해 온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킹은 트로츠키를 결국 석방시켰으며,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을 이끈다는 임무를 지닌 록펠러 가문의 밀사로서 자신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먼드 해머 박사[Dr. Armand Hammer]는 레닌의 친구로서 트로츠키가 가졌던 영향력은 록펠러 가문이 세계 공산주의를 후원했던 역할과 비교해 보자면 그렇게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공산주의는 다른 많은 “사조들[isms]”과 마찬가지로 로스차일드 가문과 마르크스[Marx]간의 협력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존 D. 록펠러가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이유가 있다면, 그는 공산주의는 마치 스스로 영속하며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기업체와 유사한 것으로, 단지 정부뿐만 아니라 화폐 시스템, 나아가 모든 자산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모든 것을 통제하며 궁극적인 독점을 지향해 나가는 체제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산주의는 마치 자신이 소유한 스탠다드 오일사의 독점이 논리적으로 보다 발전된 시스템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 독점을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진전 중의 하나는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만든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체의 설립이었습니다. 이 업체는 바로 국제 제약 및 화학 카르텔인 I. G. 화벤[I. G. Farben]사였습니다. “국가 안의 국가[a state within a state]”로도 불리는 이 기업은 1925년 ‘염료 산업 주식회사 이익 공동체[Interessen Gemeinschaft Farbeindustrie Aktien Gesellschaft]’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고, 통상적으로 단순히 I. G. 화벤[I. G. Farben]이라 불리며, 그 의미는 단지 “카르텔[The Cartel]”이라는 뜻일 뿐이었습니다. I. G. 화벤사는 1904년 독일 내 6개 메이저 화학 업체들이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던 것이 그 기원으로, 바디쉐 아닐린[Badische Anilin], 바이어[Bayer], 아그파[Agfa], 회히스트[Hoechst], 바일러-테어-메어[Weiler-ter-Meer], 그리고 그라이스하임-엘렉트론[Greisheim-Electron] 6개사가 합병한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재정적 지원뿐만 아니라 이를 진두지휘한 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던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독일내 이익은 함부르크 소재 M. M. 바르부르크[M. M. Warburg]사를 이끄는 막스 바르부르크[Max Warburg]와 같은 은행가로 대표되고 있었습니다. 막스 바르부르크는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는 독일 비밀 정보기관을 이끌었으며, 독일 황제(카이저)[Kaiser]의 재정 참모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독일이 전쟁에 패배하고 제정이 붕괴되었을 때, 막스 바르부르크는 황제와 함께 네덜란드로 망명하지 않았습니다 ; 대신 그는 새로운 정부의 재정 참모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제 군주는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권력은 은행가들의 손에 남는 것입니다. 막스 바르부르크는 파리 강화 회담[Paris Peace Conference]에 독일을 대표하여 참석했지만, 가족들 간의 즐거운 재회의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동생인 파울 바르부르크(폴 바르부르그)[Paul Warburg]는 재클 섬[Jekyl Island]에서 연방 준비법[the Federal Reserve Act]의 초안을 작성한 후(‘고리대업의 역사’ 참조--역주), 전쟁 기간 미국 은행 시스템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는 파리 강화 회담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재정 참모로서 참석했던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학생들이여. 이는 마치 이리저리 엮어 짠 양탄자처럼 어디 한 군데에 집중하기가 정말로 힘들 만큼 서로 잘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I. G. 화벤사는 이내 기업 가치가 60억 마르크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고, 약 500개에 달하는 기업들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은 칼 보쉬 교수[Professor Carl Bosch]가 맡았습니다(저런!). 바이마르 공화국[the Weimar Republic] 시절, I. G. 화벤사의 관리들은 당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 불리던 자의 필사본들을 잘 살펴 본 후 그와 가까운 유대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고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갖도록 지원해 주었습니다.

 

I. G. 화벤 카르텔의 성공은 다른 업계의 관심도 불러 일으켰습니다. 헨리 포드[Henry Ford]는 이에 깊은 인상을 받고, 포드 자동차 회사의 독일 지부를 설립했습니다(오, 제대로 명중한 화살은 아닙니다!). 그런데 I. G. 화벤사가 이 회사 주식의 40%를 구매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I. G. 화벤사는 뉴저지의 스탠다드 오일사와의 협력 속에 아메리칸 I. G.[American I. G.]라 불리는 미국내 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의 대표들에는 스탠다드 오일의 사장이던 월터 티글[Walter Teagle], 쿤-뢰브사의 폴 바르부르그[Paul Warburg], 포드사의 이익을 대표했던 에드셀 포드[Edsel Ford]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설리반 & 크롬웰[Sullivan and Cromwell] 로펌을 위해 일하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미 국무장관--역주)는 아메리칸 I. G.사의 변호사가 되었으며, 이 카르텔의 사업 목적으로 종종 뉴욕과 베를린 사이를 오가곤 했습니다. 덜레스의 법률 파트너였던 아서 딘[Arthur Dean](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6.25 휴전 협정 체결 당시 미국 협상대표를 맡았으며, 핵실험 금지조약 초안 작성에도 관여--역주)은 이후 월터 티글이 사망 전에 창설했던, 4천만 달러 규모의 티글 재단[Teagle Foundation] 이사장이 되었습니다. 여타 대기업 소유의 기관들처럼 이 재단 또한 ‘네트워크[the network]’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존 포스터 덜레스와 마찬가지로 아서 딘도 수년 간에 걸쳐 아메리칸 뱅크노트[American Banknote]사의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 이 회사는 달러 지폐 생산에 사용되는 종이를 공급하는 회사입니다. (조각 맞추기 퍼즐이 정말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우리 이야기가 그저 지루할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여기 나오는 이름과 장소들은 모두 당신들이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그렇지 않습니까?). 아서 딘은 군축 협상의 대표로 참석하는 등 무대 뒤에서 정부 협상가로도 활발히 활동해 왔습니다. 아서 딘은 록펠러 가문의 아메리칸 Ag & 화학 회사[American Ag & Chem Company] 사장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아메리칸 솔베이[American Solvay]사, 아메리칸 메탈[American Metal]사, 그 밖에도 다양한 회사의 사장직을 맡았습니다.

 

아서 딘은 클라이맥스 몰리브데넘[Climax Molybdenum]사와 아메리칸 메탈[American Metal]사를 보유한 부유했던 혹실드 가문[Hochschild Family]의 변호사로서, 혹실드 재단[the Hochschild Foundation]의 이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도 그는 외교 관계 위원회[the Council of Foreign Relations], 아시아 재단[the Asia Foundation], 인터내셔널 하우스[International House], 카네기 재단[Carnegie Foundation], 슬론 케터링 암 센터[the Sloan Kettering Cancer Center]의 명예 대표 역할도 맡았습니다.

 

독일의 스탠다드 오일사?

 

1930년 스탠다드 오일사는 독일내 주류 독점 판매권을 사들였다고 발표했는데, 이러한 거래는 I. G. 화벤사의 물밑 작업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존 D. 록펠러는 자신의 언론 담당 보좌관이었던 아이비 리[Ivy Lee]를 히틀러의 전속 보좌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의 무대를 만드는데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던 독일 재무장을 총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런 다음 스탠다드 오일사는 나치를 위한 거대한 정제 시설을 독일에 건설했고, 그들에게 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석유를 공급했습니다. 스탠다드 오일사는 그 대가의 일부로 1930년대 수많은 독일 악기들과 독일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들을 제공받았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나치 경찰 부대, 게슈타포[Gestapo]는 실제로 I. G. 화벤사가 초창기부터 운영해 온 전 세계에 걸친 비밀 네트워크 조직으로부터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칼 보쉬[Carl Bosch]에 이어 I. G. 화벤사의 사장이 되었던 헤르만 슈미츠[Herman Schmitz]는 브뤼닝 총리[Chancellor Breuning](1930-32년간 독일 총리--역주)의 개인 보좌관으로 일했던 인물이었습니다 ;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슈미츠는 히틀러가 가장 신뢰하는 비밀 보좌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잘 숨겨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절대로 사진으로 남기지 말라는 명령이 언론에 하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슈미츠는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칼 크라우흐[Karl Krauch]가 괴링[Goering]이 나치의 4개년 계획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핵심 참모가 되었을 때, 자신은 제국 의회[the Reichstag]의 명예 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과 사업상 관계를 맺었던 리하르트 크렙스[Richard Krebs]는 훗날 미 하원의 ‘반-미국적 행위 조사 위원회[the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출석하여 증언을 하게 되었을 때,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알게 된 바에 따르자면, I. G. 화벤사는 1934년에 이미 게슈타포의 완전한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진술이었으며, I. G. 화벤사는 게슈타포와 단순히 동맹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1924년, 크루프 인더스트리[Krupp Industries]가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월 스트리트에서 가장 장 알려진 2개 금융사였던 할가르텐 & 컴파니[Hallgarten & Company]와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가 천만 달러의 현금을 대출해 주었고, 그 덕택에 크루프 인더스트리는 구제될 수 있었습니다. 독일 재무장 계획은 딜런 리드[Dillon Read]사가 1억 달러에 달하는 독일 채권[German bonds]을 월 스트리트에 유통시키고 난 후에야 마침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들어선 연합군 정부[the Allied Military Government]에서 윌리엄 드레이퍼 장군[General William Draper]이 독일 경제를 담당하는 총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딜런 리드[Dillon Read]사의 파트너였던 것입니다.

 

1939년에는 스탠다드 오일사의 부사장이었던 프랭크 호워드[Frank Howard]가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증언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이 곳에서 사업을 하든 하지 않든, 전시에 적용되는 잠정 협정에 따라 주어진 계획들을 완수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기 아메리칸 I. G.사의 임원진은 록펠러 가문의 은행인 내셔널 시티 뱅크의 사장이던 찰스 미첼[Charles Mitchell], 칼 보쉬[Carl Bosch], 폴 바르부르그[Paul Warburg], 헤르만 슈미츠[Herman Schmitz], 그리고 슈미츠의 조카였던 막스 일그너[Max Ilgner]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프랭크 호워드는 연구 및 해외 협정 체결 분야의 총 책임자로 스탠다드 오일사가 펼치는 다양한 사업에 있어서 수 년 간에 걸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또한 1930년대 슬론 케터링 연구소[Sloan Kettering Institute] 연구 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습니다. 그는 슬론 케터링 연구소에서 화학 치료법(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화학 치료로 죽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하톤) 개발 책임자로 더스티 로즈[Dusty Rhoads](미 병리학자이자 종양학자--역주)를 임명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로즈는 워싱턴 미 육군 본부에서 화학전[the Chemical Warfare Service]을 총 지휘하기도 했습니다(역량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군요). 제네랄 모터스사의 알프레드 슬론[Alfred Sloan]과 찰스 케터링[Charles Kettering]을 설득하여 암 센터 설립에 상당한 기금을 내게 만든 인물이 바로 프랭크 호워드였으며, 이후 이 암센터는 그들의 이름을 따게 되었던 것입니다(이제 당신들은 왜 암이 결코 치료되지 않는 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유한 애터톤 가문[Atherton family]의 일원이었던 프랭크 호워드(1890-1964)는 두 번 결혼했으며, 자신의 두 번째 아내는 영국의 명망있는 귀족 가문 출신인 리즈 공작 부인[the Duchess of Leeds]이었습니다. 1694년 처음으로 호칭이 주어졌던 제 1대 리즈 공작[the first Duke of Leeds]은 토마스 오스본 경[Sir Thomas Osborne]으로 그는 제임스 2세[King James II](킹 제임스 판본 성경을 만든 그 왕가를 말하는 것입니까?) 왕정 전복의 음모를 꾸몄던 핵심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1688년 윌리엄 3세가 영국의 권력을 거머쥐었던 것입니다(‘유태인들의 영국 지배사’ 참조--역주).

 

찰스 2세[King Charles II] 치세기 오스본은 네덜란드와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도록 했으며 요크 공작[the Duke of York]의 딸 메리[Mary]가 오렌지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내셔널 인명 사전[The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에 보면 오스본은 “5년간 영국 하원을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은 부유해졌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King Louis XIV]와 반역적인 협상을 진행한 혐의로 찰스 2세에 의해 탄핵되었으며, 1678년부터 1684년까지 런던 타워[the Tower of London]에 감금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석방된 이후에도 오렌지공 윌리엄을 영국 국왕으로 만들기 위한 음모를 활발히 꾸몄으며, 중요한 요크 지방을 자신의 관할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 오렌지공 윌리엄이 그에게 ‘리즈 공작’이라는 작위를 하사했던 것입니다. 당대의 음모가들은 윌리엄을 영국 왕좌에 올려 둠으로써, 1694년 영국 은행[the Bank of England]의 설립이라는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결국 암스테르담의 은행가들에게 대영 제국의 부를 통제할 권한을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오스본의 전기에 따르자면, 그는 후에 자코바이트 음모[Jacobite](제임스 2세 왕정 복위 운동--역주)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1695년에는 동인도 회사[the East India Company] 사업 허가권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탄핵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은 결국 끝까지 진행되지 못하고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제 11대 리즈 공작(제 12대 리즈 공작(프란시스 오스본[Francis Osborne])의 오기--역주)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워싱턴 주재 영국 부대사로 있었으며, 1936년에서 1947년까지, 즉 제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는, 교황청 주재 특별 대사로 근무했습니다. 가족의 일원이 들라노 가문[the Delano family]과 결혼하여, 프랭클린 들라노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32대 미국 대통령--역주)의 친척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촌이던 챈도스 자작[Viscount Chandos]은 영국 고위 관료로1942년에서 1945년간 처칠 전시 내각의 일원이었으며, 후에 로스차일드 회사[the Rothschild firm], 알리안스 보험[Alliance Assurance] 그리고 임페리얼 캐미컬 인더스트리[Imperial Chemical Industries]와 같은 기업체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프랭크 호워드는 스탠다스 오일사와 I. G. 화벤사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합성 고무 개발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이는 2차 세계 대전 기간 독일의 핵심 물품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부타디엔 고무[Buna(Butadienne) Rubber]”(대표적인 합성 고무--역주)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호워드는 롬 & 하스[Rohm and Haas]사의 고문도 맡았는데, 이는 이 회사에 대한 록펠러 가문의 커넥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말년에 그는 프랑스 파리에 거주했지만, 뉴욕 록펠러 센터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스탠다드 오일사의 사장이었던 월터 티글[Walther Teagle]은 아메리칸 I. G.사의 주식 50만주를 보유했는데, 이러한 지분은 나중에 티글 재단을 설립하는 자본금이 되었습니다. 헤르만 메츠[Herman Metz]는 아메리칸 I. G.사의 사장이자 독일 I. G. 화벤사가 전적으로 소유했던 제약회사인 H. A. 메츠[H. A. Metz]사의 사장이기도 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동안 외국계 자산 관리인이었던 프란시스 가번[Francis Garvan]은 I. G. 화벤사의 많은 사업상의 비밀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1929년에는 그가 관련 사항들을 누설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고소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고소는 보쉬사[Bosch Company]의 고문으로 일한 적이 있는 (뉴욕주) 법무장관 머튼 루이스[merton Lewis]를 통해 법무부가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주미 독일 대사관 고문이었던 존 크림[John Krim]은 존 킹 상원의원[senator John King](당신들이 아는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 아닙니다)이 함부르크 아메리칸 라인[the Hamburg American Line]사로부터 3년간 15,000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 그는 오토 칸[Otto Kahn](독일 출신의 미 투자 은행가--역주)을 자신의 선거 비용 관리인으로 지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6년간 미 법무장관을 지냈던 호머 커밍스[Homer Cummings]는 후에 제너럴 아닐린 & 필름[General Aniline and Film](GAF)사의 고문이 되어 10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제너럴 아닐린 & 필름사(GAF)는 스위스 회사 소유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그렇지만GAF사는 “적국 소유” 기업일 수도 있다는 커다란 의혹을 받았으며, 결국 미국 정부에 의해 인수되었습니다. 1927년부터 1934년까지 GAF사 사장은 존 포스터 덜레스였습니다 ; 그는 또한 I. G. 화벤사의 기업체 네트워크의 일부였던 인터내셔널 니켈[International Nickel]사의 사장이기도 했습니다.

 

덜레스는 에버리 커넥션[the Avery connection]을 통해 록펠러 가문과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덜레스는 1936년 에버리 록펠러[Avery Rockefeller]가 만든 업체인 슈로더-록펠러사[Schroder-Rockefeller Company]라 불리던 새로운 투자 회사의 변호사였습니다. 이 회사는 히틀러의 개인 은행이었던 슈로더 은행과 록펠러의 이익을 결합한 조직이었습니다. 쿠르트 판 슈로더 남작[Baron Kurt van Schroder]은 히틀러의 최측근 중의 한 명으로 나치 친위대[the SS]의 고위 장교였습니다. 슈로더는 나치 친위대가 독일 기업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친위대에 자금을 제공해 주었던 케플러 협회[the Keppler Associates]의 회장이기도 했습니다. 케플러는 1936년 시작되었던 괴링[Goering]의 4개년 계획에서 공업 부문을 담당했던 관료였습니다.

 

아메리칸 I. G.사는 2차 세계 대전 동안 제너럴 아닐린 & 필름사(GAF)로 사명을 변경했지만, 여전히 독일 I. G. 화벤사의 자회사였던 스위스의 I. G. 화학사[I. G. Chemie of Switzerland]가 완전한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던 회사였습니다. 헤르만 슈미츠[Herman Schmitz]의 처남이던 가도우[Gadow]가 GAF사의 사장이었습니다. I. G. 화벤사가 체결했던 국제 협정들은 미국의 전쟁 수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러한 협정들을 통해 마그네슘, 합성 고무, 주요 의약품들의 미국에 대한 공급량을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I. G. 화벤사의 염료 부문 사업의 총책임자였던 게오르그 폰 슈니츨러 남작[Baron George von Schnitzler]은 막강한 권력을 보유했던 폰 라트 가문[von Rath family]과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폰 라트 가문은 히틀러가 계좌를 가지고 있었던 J. H. 슈타인 은행[J. H. Stein Bankhaus]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또한 슈니츨러는 미국에서 제약 회사를 설립했던 폰 말린크로트 가문[von Mallinckrodt]과도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I. G. 화벤사의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열정적인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I. G. 화벤사는 1933년 나치당에 450만 제국 마르크[reichmarks]를 제공했습니다 ; 1945년까지 I. G. 화벤사가 나치당을 위해 지원했던 후원금은 총 4천만 제국 마르크에 달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I. G. 화벤사가 다른 기관이나 단체에 지원한 후원금을 모두 다 합친 것과 동일한 액수였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혹시 시오니스트가 있습니까?

 

나치 시대를 연구한 학자인 앤토니 서튼[Antony Sutton]은, 나치에 자금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영국 은행[the Bank of England]과 그 총책임자였던 몬테규 노먼 경[Sir Montague Norman]의 역할은 배제한 채, 히틀러에 대한 독일내 지지자들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서튼의 이러한 연구 방식은 그가 영국인이었던 사실이 어쩌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내 유태인들의 영향력에 대해 언급했던 말들을 되새겨 본다면, 나치 시대에 I. G. 화벤사의 역할을 설명하기는 아주 힘들 것입니다. I. G. 화벤에 대한 피터 헤이즈[Pter Hayes]의 신뢰할만한 연구에 따르자면, 1933년 I. G. 화벤사는 최고위급 이사회에 10명의 유태인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I. G. 화벤사는 그 시작부터 로스차일드가 관여했던 것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계획하고, 막스 바르부르크와 같은 독일내 하수인들과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왕자[Prince Bernhard]는 1930년대 초반 나치 친위대[the SS]에 가입했습니다. 그 때 그는 I. G. 화벤사의 자회사였던 화벤 빌더사[Farben Bilder] 이사회의 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회사로부터 전후 자신이 만든 초특급 비밀 정책 결정 그룹인 빌더버그 그룹[the Bilderbergers](‘미국-오리온 외계인간 협정’, ‘비밀 정부’ 참조--역주)의 명칭을 따왔던 것입니다(오 저런, 실타래는 끝이 없는 것입니까?). I. G. 화벤사의 고위 간부들은 하인리히 힘믈러[Heinrich Himmler]의 친교 단체[the Circle of Friends]를 구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처음에는 I. G. 화벤사의 한 자회사의 사장이었던 케플러[Keppler]의 이름을 따 ‘케플러의 친교 단체’로 불렸던 것입니다. 케플러의 조카였던 프리츠 J. 드라네푸스[Fritz J. Dranefuss]가 하인리히 힘믈러의 개인 보좌관이었습니다. 40명의 친교 단체 회원들은 힘믈러에게 엄청난 거액의 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그들 가운데 8명은 I. G. 화벤사 또는 그 자회사의 고위 간부들이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공습으로 독일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황폐화되었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큰 건물들 가운데 하나였던 I. G. 화벤사의 건물은 “기적적으로” 어떠한 손상도 입지 않고 무사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거대한 록펠러의 저택도 그 수많았던 폭격에도 불구하고 역시 무사히 남겨졌습니다. 프랑크푸르트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전후 독일 정부였던 연합군 정부가 I. G. 화벤사의 멋진 건물을 정부 청사로 사용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군정을 이끌었던 루키우스 클레이 장군[General Lucius Clay]은 나중에 뉴욕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은행가들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정치 부문을 담당했던 로버트 머피[Robert Murphy]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주재했는데(안됩니다!), 여기서 그는 I. G. 화벤사의 관리들과 쿠르트 폰 슈로더 남작과의 연루 관계를 성공적으로 감출 수 있었습니다. 슈로더는 단기간 감금되었다가 이내 풀려났으며, 자신이 해오던 은행 사업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경제 부문은 루이스 더글라스[Lewis Douglas]가 담당했는데, 그는 뉴욕 미모리얼 암 센터[Memorial Cancer center] 창립자의 아들이었으며, 후에 뮤추얼 라이프[Mutual Life]사의 사장이자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의 임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더글라스는 독일 담당 미 고위 위원회[U.S. High Commissioner for Germany] 위원 후보에 올랐지만, 처남이었던 존 J. 맥클로이[John J. McCloy]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면, 더글라스, 맥클로이, 그리고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Chancellor Konrad Adenauer](충격, 충격), 이렇게 세 사람은 모두 J. P. 모건사[J. P. Morgan Company]의 파트너였던 존 진서[John Zinsser]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점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놀라지 않고 이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세계를 지배해 온 카르텔로서, I. G. 화벤사와 함께 록펠러의 이익에 기반해 I. G. 화벤사가 통제해 온 미국내 제약 업체들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약제의 개발과 판매에 책임이 있었습니다. 1908년에서 1936년까지 I. G. 화벤은 설파닐아미드[Sulfanilamide](항생제의 일종--역주)의 개발을 지원해 왔는데, 이것은 의료 분야에 있어서 잠재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약품이었습니다. 1920년 I. G.사는 스위스의 주요 제약 회사였던 산도즈[Sandoz]사 및 시바-가이기[Ciba-Geigy]사와 협력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1926년 I. G.사는 다이너마이트 회사였던 다이너마이트-노벨[Dynamit-Nobel]사의 독일 자회사를 합병했습니다. 이 회사의 영국 자회사는 당시 다른 영국 기업에 의해 합병되었습니다. 이후 I. G.사의 관리들은 스탠다드 오일사의 관리들과 높은 수익이 예상되는 합성 석탄 제조 사업에 관한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합성 석탄은 스탠다드 오일사의 독점 구도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간에는 아메리칸 I. G.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고, I. G. 화벤사와 스탠다드 오일사가 모두 이 회사 운영에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수익은 양사가 배분했습니다.

 

찰스 하이엄[Charles Higham]이 쓴 ‘적과의 교역[Trading with the enemy]’이라는 책에는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록펠러 가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히틀러의 폭격기들이 런던에 폭탄 세례를 가하는 동안, 독일은 그들이 소모하는 가솔린에 대해 스탠다스 오일사에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넬슨 록펠러를 미국 국내 문제 조정관[Coordinator of Inter-American Affairs]으로 지명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요 임무는 남미에 진출한 독일 선박들이 스탠다드 오일사의 탱크를 통해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조정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개인 기업이었던 인터내셔널 베이직 엑소노미사[International Basic Exonomy Corporation]는 물론 콜롬비아 커피 시장에 진출해 있던 업체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남미 국가들로부터 중요한 양보를 받아내는 데 직위를 활용했습니다. 이후 그는 즉각적으로 가격을 올렸고 그로 인한 수익으로 70억 달러에 달하는 남미 부동산을 사들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양키 제국주의[Yanqui Imperialismo]”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의 비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또한 남미 지역내 수십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마약 재배 농장도 사들였습니다.

 

닉슨이 부통령 시절 남미를 방문했을 때, 닉슨이 탄 차량에 대한 공격이 있었는데, 미 정부의 관리들은 이를 록펠러 가문의 약탈 행위가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약탈 행위는 지금 이 순간까지 남미 국가내 만연해 있는 반미 감정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1명의 장교를 포함한 총 24명의 독일 관료들이 기소되었는데, 그들 모두는 I. G. 화벤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헤르만 슈미츠[Herman Schmitz]의 조카였던 막스 일그너[Max Ilgner]를 포함한 8명은 석방되었습니다. 슈미츠는 가장 중형이었던 징역 8년형에 선고되었습니다. 일그너는 실제로 3년형에 선고되었지만, 심리 도중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인정되어 즉시 풀려났습니다. 판사는 C. G. 셰이크[C. G. Shake]였고, 검사는 앨 민스코프[Al Minskoff]였습니다.

 

1988년 5월 3일, I. G. 화벤사는 월 스트리트 저널지 헤드라인 기사를 통해 자신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리기도 했습니다--‘독일이 세계 화학 시장을 석권하다’. F. 오보이얼[F. O’boyle] 기자는 1987년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5대 화학 회사를 다음과 같이 나열했습니다 : 1. BASF 258억 달러, 2. 바이어[Bayer] 236억 달러, 3. 회히스트[Hoechst] 235억 달러, 4. ICI 200억 달러, 5. 뒤퐁[DuPont] 170억 달러.

 

첫 세 개의 기업은 1945년에서 1952년간 연합군 정부에 의해 I. G. 화벤사가 “해체”되면서 생겨난 기업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1911년 미 연방 대법원 평결에 의해 스탠다드 오일사가 “해체”될 때와 대단히 유사했습니다(‘록펠러 카르텔의 기원과 배후 세력’ 참조--역주). I. G. 화벤으로부터 분할된 3개 업체의 총 매출 규모는 약 72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이는 경쟁 업체들을 압도하는 것으로 ICI사와 뒤퐁사의 매출액을 합쳐도 그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87년 회히스트[Hoechst]사는 셀라니즈사[Celanese Corp.]를 272억 달러에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오보이얼 기자는 이들 “빅 쓰리(I. G. 화벤으로부터 생겨난 회사들[Spin-offs])”가 여전히 옛 카르텔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각각의 회사는 저마다 특화된 분야에서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 상호간의 경쟁은 제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들간의 공모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기에 이 “빅 쓰리”가 세금은 얼마나 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내 생각에 당신들도 어쩌면 상황을 눈치채기 시작했을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황폐화된 유럽을 재건하는 “이타적인” 계획을 지원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육군 참모총장인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의 이름을 딴 ‘마셜 플랜[the Marshall Plan]’이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지 마셜은 당시 상원 의원이던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의원이 상원 의사당 바닥에 “엄청난 거짓말쟁이”라고 써서 비난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마셜 플랜은 단지 미국 납세자들을 약탈하기 위해 만든 또 하나의 록펠러 가문의 계획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1948년 12월 13일,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의 편집장이었던 로버트 맥코믹 대령[Col. Robert McCormick]은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사설을 통해 마셜 플랜을 빙자한 ‘에소[Esso](스탠다스 오일의 후신인 엑슨모빌사의 상품 거래명으로 스탠다드 오일사를 지칭, Standard Oil의 이니셜인 S, O를 알파벳 발음대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역주)의 약탈 행위’를 비난했습니다. 마셜 플랜 법안은 체이스 맨하탄 은행장이자 넬슨 록펠러의 매형[brother-in-law](외삼촌의 오기--역주)이던 윈트롭 앨드리치[Winthrop Aldrich],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 그리고 앤더슨 클레이튼사[Anderson, Clayton Company]의 사장이었던 윌리엄 클레이튼[William Clayton]과 같은 강력한 인물들의 지원 속에 신속하게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마셜 플랜은 브레튼 우즈 협정[the Bretton Woods Agreement], UN 구제 부흥 사업[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여타 몇 가지 사례와 더불어 전후 대표적인 대국민 기만 행위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록펠러 가문은 전쟁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벨기에가 이권을 보유한 아프리카 구리 광산 업체 오-카탕가 광산 연합[Union Miniere du Haut Katanga], 그리고 예수회 통제 은행인 쏘씨에테 제네랄[the Societe Generale]의 주식을 대거 사들였습니다. 이러한 투자 직후 록펠러 가문은 광산업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대담한 시도에 착수했습니다. 자신들의 하수인들을 이용한 ‘그렌지스베르그 작전[Grangesberg operation]’을 통해 지역 폭동을 배후 조종했던 것입니다.

 

오-카탕가 광산 연합은 원래 에드워드 7세[king Edward VII]의 재정 참모였던 어니스트 카셀 경[Sir Ernest Cassel]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카셀 경의 딸은 후에 영국 왕가의 일원이자 로스차일드 가문과도 연계되어 있던 마운트바텐 경[Lord Mountbatten]과 결혼했습니다. 그렌지스베르그 작전은 보 함마슐트[Bo Hammarskjold]에 의해 지휘되었는데, 그의 동생이던 다그 함마슐트[Dag Hammarskjold]는 당시 UN 사무총장이었습니다(오, 안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Bo]는 록펠러 가문이 지원한 폭동이 진행중인 동안 콩고에서 벌어진 교전 상황 속에서 자신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어 사망했습니다. 누가 죽인 것인지, 왜 죽인 것인지에 대한 많은 설들이 있습니다만, 여기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지체하지는 않겠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콩고 개입은 자신들의 수하에 있던 국무부 소속의 딘 러스크[Dean Rusk]와 조지 볼[George Ball], 그리고 파울러 해밀턴[Fowler Hamilton]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미국 정치판에서 록펠러 가문의 이익은 계속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존 D. 록펠러의 재정관이었던 찰스 프렛[Charles Pratt]은 뉴욕에 있던 자신의 저택이 외교관계 위원회의 세계 본부로 쓰일 수 있도록 기증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손자인 조지 프렛 슐츠[George Pratt Shultz]는 후에 미 국무장관(1982-89년 레이건 정부 시절 국무장관--역주)이 되었습니다.

 

진짜 존 버치 소사이어티[John Birch Society]?

 

록펠러 가문은 미국내 ‘트로츠키 공산주의 그룹[the Trotskyite Communist group]’이나 ‘산업 민주주의 연맹[the League of Industrial Democracy]’과 같은 좌파 단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진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이나 시드니 후크[Sidney Hook]와 같은 “반-공산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록펠러 가문은 ‘존 버치 소사이어티[John Birch Society]’(‘KAL 007기는 격추되지 않았다!’ 참조--역주)에 대한 후원을 통해 “우파[rightwing]”를 지원하는 데에도 역시 적극적이었습니다(‘국제 사회주의와 뉴 월드 오더’ 참조--역주). 넬슨 록펠러는 32단계 메이슨인 로버트 웰치[Robert Welch]가 존 버치 소사이어티를 운영하는 데 자신의 전력을 쏟을 수 있도록, 웰치 가문의 기업인 웰치 캔디 회사[the Welch Candy Company]를 가장 높은 가격으로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수 년이 지난 후에, 미국의 애국자들은 존 버치 소사이어티가 자신들이 그렇게 홍보해 온 “반-공산주의”를 향한 목표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상 존 버치 소사이어티는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자들의 요구 사항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들의 요청이 그러한 행보를 보이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애국자들은 유스타스 멀린스[Eustace Mullins]를 포함한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저자들이 약 30년간 존 버치 소사이어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점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멀린스의 책들을 구매하려는 수 천 명의 독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존 버치 소사이어티는 멀린스의 책들에 대한 리뷰를 쓰거나 이를 추천 도서 목록에 올리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아무런 성과 없이 수 십 년을 보낸 후에, 존 버치 소사이어티는 스스로의 활동으로 인해 완전히 신뢰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 단체의 위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CIA에서 대외 선전을 담당했던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는 자신이 간행하는 잡지인 ‘내셔널 리뷰[the National Review]’지를 통해 존 버치 소사이어티를 “신랄하게”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캠페인도 빈사 상태의 조직을 회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누가 내셔널 리뷰지를 홍보하는 지도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자, 우리는 찰튼 헤스턴[Chalton Heston]과 같은 인물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인데, 그는 단순히 가짜 정보와 사실에 대한 외면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교회, 역시!

 

록펠러 가문은 뉴욕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몇몇 교회들에 대해서도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오, 저런, 교회만이 아닙니다!). 바로 J. P. 모건을 통해 재정 지원을 받는 월 스트리트의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는 맨하탄에 소재한 약 40개에 달하는 상업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내부 투자가들의) 공개된 투자 내역에 따르자면 5,000만 달러가 넘는 주식 포트폴리오도 가지고 있어, 실질적인 연간 수입만3,500만 달러가 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입 가운데 260만 달러만이 자선 사업에 쓰이고 있습니다. 트리니티 교회의 주임 목사는 연봉 10만 달러가 넘으며,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Upper East Side]의 현대식 건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트리니티의 묘지는 구획당 최소 1,250달러에서 2만 달러에 판매됩니다. 5번가의 세인트 바르톨로뮤 교회[St. Bartholomew’s Church]의 연간 수입은 320만 달러에 달하며 자선 활동에는 단 10만 달러만이 쓰입니다. 이 교회의 주임 목사는 파크 가[Park Avenue]에 있는 방 13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의료 분야에 있어서도 록펠러 가문은 확고한 독점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궁금하다면, 의사 처방 편람[Physicians Desk Reference]을 구해서 제약 회사의 명단을 살펴 보십시오.

 

록펠러 가문은 슬론 케터링 암 센터[the Sloan Kettering Cancer Center]를 통해 암 치료 산업을 통제합니다. 제약 회사들은 모두 체이스 맨하탄 은행, 스탠다드 오일사, 또는 다른 록펠러 가문의 회사 출신의 임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 외과의사 협회[the American College of Surgeons]’는 강력한 ‘병원 조사 위원회[Hospital Survey Committee]’를 통해 병원들에 대한 독점적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병원 조사 위원회’는 윈트롭 앨드리치[Winthrop Aldrich], 데이비드 맥알파인 파일[David McAlpine Pyle]과 같은 록펠러의 통제력을 대표하는 위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유한 자들의 클럽”으로 알려진 의사들간의 협회인 ‘뉴욕 의학 아카데미[the New York Academy of Medicine]’는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 그리고 그 예하 단체들의 기증으로 새로운 건물을 제공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종자돈”으로 활용하여 기금을 모으는 캠페인을 펼쳐 또 다른 새로운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루즈벨트 커넥션[The Roosevelt Connection]

 

J. P. 모건[J. P. Morgan]사의 이익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피버디[Peabody]사의 사장으로 록펠러 가문이 선택했던 인물은 키더[Kidder]사 전무 이사의 사위였던 린드슬리 윌리엄스 박사[Dr. Lindsley Williams]였습니다(J. P. 모건사는 원래 피버디사로 불렸던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윌리엄스 박사는 그레이스 키더 포드[Grace Kidder Ford]와 결혼했습니다. 윌리엄스 박사는 의사로서의 실력은 형편없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지만, 가족 관계에 따른 배경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선거 캠페인의 중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루즈벨트가 비록 몇몇 압박성 질환에 의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미국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해 내기에 손색이 없다는 건강 소견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윌리엄스 박사의 견해는 콜리어스지[Collier’s Magazine]의 기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이를 통해 루즈벨트의 건강에 대한 대중의 우려는 잠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윌리엄스는 루즈벨트 내각에서 신설된 직책이었던 보건 장관에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록펠러 가문은 ‘록펠러 보건 위원회[the Rockefeller Sanitary Commission]’를 설립하여, 자신들의 사업을 소득 수준이 낮은 남부 주들로 크게 확장시켰으며, 이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 위원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록펠러 재단 창설 헌장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로, 오랜 기간 록펠러 가문의 하수인이었던 위클리프 로즈 박사[Dr. Wickliffe Rose]였습니다. 록펠러 보건 위원회는 자선 사업을 목적으로 했지만, 남부 11개주에서 모두 재정적인 기여금을 요구했으며, 이를 통해 각각의 주에 보건부를 설치한 다음, 자신들의 ‘제약 트러스트[Drug Trust]’가 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테네시주에서 록펠러의 이익을 대표했던 올린 웨스트 박사[Dr. Olin West]는 시카고로 자리를 옮긴 후, 40년간 미국 의사 협회[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사무총장이 되어 무대 뒤의 실권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리고 의료와 교육

 

‘록펠러 의학 연구소[The Rockefeller 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는 그 명칭에서 “의학 연구[Medical Research]” 부분을 떼어 냈습니다 ; 연구소장이던 데트레브 브롱크 박사[Dr. Detlev Bronk]는 이 연구소의 자선 사업을 통해 얻게 된 수익으로 60만 달러짜리 저택에 살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록펠러 일반 교육 이사회[Rockefeller’s General Education Board]’는 1억 달러가 넘는 돈을 미국 의학 교육 기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데 썼으며, 의사들로 하여금 “역증 요법[allopathic]”(‘대체 의학’에 반대되는 표현으로 ‘과학에 기반한 현대 의학’--역주)을 배우고, 외과적 수술과 다량의 약품 처방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이사회는 원래 피버디 재단으로부터 생겨난 단체였습니다. 이 이사회는 흑인 교육에도 660만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록펠러 일반 교육 이사회의 정치 철학 가운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조는 1917년 콜롬비아 대학에 600만 달러를 기부하여 설립한 “진보적인” 링컨 스쿨[Lincoln School]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학교로부터 진보적인 교육자들과 사회 과학자들의 네트워크가 전국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악의적인 영향력은 공산당[the Communist Party]의 목표와도 밀접히 연계된 것이었습니다. 공산당 또한 록펠러 가문으로부터 수 백만 달러를 받았던 정당이었습니다. 링컨 스쿨은 그 시초부터 미 전역의 초중등 학교에 있어 혁명적인 학교의 모델로 여겨졌습니다. 링컨 스쿨은 공식적이며 제대로 확립된 모든 교육 이론들을 폐기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라틴어와 대수학, 그리고 문제 해결에 있어서 논리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과목들에 기반한 ‘맥거피 리더[McGuffy Reader]’(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사용되었던 미국 교과서 명칭--역주) 방식의 교육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자, 그럼 오늘날의 상황이 어떠한 지를 한 번 살펴 보십시오!

 

록펠러 연구소의 재정적 후원금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와 같은 핵프로그램을 담당했던 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을 길러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소련 간첩 혐의자로 드러나 정부 연구소로부터 퇴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그의 동료들과 협력 연구자들도 소련 간첩임이 발각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처벌은 “연좌제[guilt by association]”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유사한 그룹들을 많이 만들어 냈으며, 이러한 그룹들은 오늘날 ‘만악의 근원’이 되어 국가를 병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단체들 가운데 하나가 ‘사회과학 연구 위원회[the 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로, 이 단체는 전국에 걸쳐 “가난 산업”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매년 1,300억 달러가 넘는 국가 예산을 지출하지만, 소속된 활동가들의 급여로만 약 60억 달러가 쓰입니다. 전국의 빈민층들에게 식량과 주택을 제공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 돈은 방대한 행정적 네트워크를 거치면서 증발하고, 기생충과도 같은 “상담사들”에게는 후한 보수가 지급됩니다.

 

다르마여, 나는 당신이 지쳤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리는 곧 이 부분을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2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가벼운 운동을 하기 바랍니다.

 

수 년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록펠러 가문과 관련된 폭로는 그들의 영향력에 있어 그저 표면에 약간의 스크래치를 낼 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대한 버로우 웰컴 제약회사[Burroughs Wellcome drug firm]는 “자선 단체”인 웰컴 트러스트[Wellcome Trust]가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트러스트는 올리버 프랭크스 경[Lord Oliver Franks]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프랭크스 경은 미국을 영국 식민지로 유지하는 ‘런던 커넥션[London Connection]’의 핵심 멤버인 것입니다. 프랭크스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주미 대사를 역임했습니다. 최근에 그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장이 되었으며, 영국에서 록펠러 재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히틀러의 개인 은행 계좌를 관리했던 슈로더 은행[the Schroder Bank]의 사장이기도 하며, 로즈 장학금[Rhodes scholarships] 수여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보유한 로즈 트러스트[Rhodes Trust]의 이사장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한 시카고 대학의 방문 교수이면서, 영국 5대 은행 가운데 하나인 로이드 은행[Lloyd’s Bank]의 총재이기도 합니다. 그가 배신했다는 소문은 잊어버리십시오. 산와[Sanwa]로 옮긴 것은 그저 영리한 직위 변경에 불과합니다--언론의 속임수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물망은 끝이 없어 보입니다.

 

다른 록펠러 재단 파생 단체들로는 워싱턴의 영향력있는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the Brookings Institution]와 전미경제연구소[the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를 들 수 있는데, 이 기관들의 연구 결과는 주식 시장 조작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 행정 청산소[the Public Administration]는 지자체 공무원들의 행동 패턴을 결정합니다 ; 주 정부 위원회[the Council of State Governments]는 각 주의 입법 활동을 통제합니다 ; 태평양 관계 연구소[th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는 미국의 가장 악명높은 공산주의 전위 기관입니다. 록펠러 가문은 이 기관의 재정 참모인 쿤 & 뢰브사[Kuhn, Loeb Company] 소속의 루이스 리히텐슈타인 스트라우스[Lewis Lichtenstein Strauss]에게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사실상의 총 책임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록펠러 가문은 체이스 맨하탄 은행[the Chase Manhattan Bank]의 주식을 5% 보유함으로써 이 은행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1%만 소유해도 실질적인 통제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 은행 한 군데를 통해서만 그들은 알려진 수치로 425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체이스 맨하탄 은행은 4대 보험회사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 중 3개사는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에퀴터블[Equitable], 뉴욕라이프[New York Life]인데, 이 보험회사들이 보유한 자산 규모는 먼 옛날인 1969년을 기준으로 해도 1,13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오늘날은 어느 정도의 규모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1980년 레이건 정부의 출범과 함께 록펠러 가문은 명목상 “반-공산주의” 정부를 탄생시킴으로써 세계 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지가 이제는 약화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레이건은 자신의 전임자인 지미 카터 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소련의 최고위급 인사들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 자리를 갖곤 했으며, 고르바초프는 캘리포니아 목장에 초대되었던 것입니다.

 

레이건 선거 운동은 벡텔사[Bechtel Corporation]의 두 명의 관리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한 명은 벡텔사의 사장으로 스탠다드 오일의 상속권을 보유한 조지 프랫 슐츠[George Pratt Schultz]였으며, 다른 한 명은 그의 보좌관이었던 캐스퍼 와인버거[Casper Weinberger]였습니다(이것 참 큰일이군요!)(이들은 록펠러 카르텔에 숨어들었던 볼셰비키 스파이들, ‘시오니스트, 볼셰비키, 그리고 록펠러 카르텔’ 참조--역주). 이후 슐츠는 국무장관, 와인버거는 국방장관에 지명되었습니다. 벡텔사는 1936년 슈로더 은행과 록펠러 가문의 상속권자들간의 제휴로 설립되었던 슈로더-록펠러사[Schroder-Rockefeller Company]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던 회사였습니다.

 

돈이 열쇠다.

 

록펠러 가문은 금융 부문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넬슨 앨드리치 상원의원이 연방 준비법 탄생의 모태가 되었던 재클 섬에서의 비밀 회합을 가졌던 1910년 11월 이래로, 록펠러 가문은 당신들을 런던 커넥션(미국을 영국 식민지로 유지하는 계획, 상기 참조--역주)의 범주 안에 묶어 두었던 것입니다. 카터 행정부 시기, 데이비드 록펠러는 ‘관대하게도’ 자신의 개인 보좌관이었던 폴 볼커[Paul Volcker]를 워싱턴으로 보내 ‘연방 준비 이사회[the Federal Reserve Board]’를 이끌도록 만들었습니다. 레이건은 1987년 마침내 그를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으로 대체했지만, 그린스펀은 J. P. 모건사의 파트너였습니다.

 

당신들의 은행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자신들이 기획한 수많은 재정적 ‘쿠데타’를 통해 끝없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익을 많이 남긴 쿠데타는 루즈벨트의 행정 명령에 따라 미국 시민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금을 몰수한 것이었습니다. 당신들 시민들은 ‘사적 소유의 연방 준비 시스템’에 개개인들이 보유한 금을 다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영리한 수완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미국 헌법은 수용권[eminent domain]을 행사할 때 몰수를 허용하지만, 개인 소유물에 대한 몰수는 금지합니다. 어쨌거나 금의 새로운 주인들은 가치를 재평가해 온스당 20달러를 35달러로 올렸으며, 엄청난 수익을 남겼습니다. 당신들은 다음에 다가올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새로운 헌법, 새로운 주편성[the Newstates], 총기 몰수, 그리고 어떤 것은 현행 헌법에서 이미 시행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나는 분명코 당신들이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희망하는데, 왜냐하면 당신들은 지금 벼랑 끝에서 시소를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 : 브레인 역할

 

지금까지 온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록펠러 가문과 그들의 해외 통제자들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을 살펴 보았으며, 이들은 분명코 미국인들의 삶의 모든 측면은 물론이고 해외의 형제들에게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미국인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길 원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 정의는 모든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의를 추구할 때에만 달성될 수 있습니다. 정의는 각각의 시민들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들의 의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에만 퍼져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당신들의 헌법과 권력을 찬탈한 자들이 저질러 온 모든 범죄들의 기록입니다. 당신들은 록펠러 독점주의자들이 연방 정부와 주 정부에 포진해 있는 자신들의 하수인들을 통해 휘둘러 온 그들의 사악한 권력으로부터 고통스러운 교훈을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 곁에는 론 폴[Ron Paul](세 차례 텍사스주 하원의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88년, 2008년, 2012년 대선에 도전--역주)과 같은 용감한 자도 있습니다. 그는 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연방 준비 시스템, FBI, 미 국세청, 그리고 CIA 폐지라는 대단히 민감하지만 실질적인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이 자의 이름을 들어 본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좋습니다, 대통령 후보로서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면, 그가 발행하는 뉴스레터에 대한 추천을 받아 본 적은 있습니까?

 

FBI의 기능은 뻔뻔하게도 “범죄와의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활동의 90%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정치적 이단아들을 괴롭히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이러한 종류의 정보를 전하는 저자들을 포함하여.

 

범죄적 조합주의자들[the criminal syndicalists]은 현재 미국으로부터 매년 1조 달러 이상을 약탈해 가고 있으며, 그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3천억 달러 이상의 수익은 제약과 의료 산업으로부터 거둬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탈 행위에 맞서 싸우려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기에 앞서, 어쩌면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건강부터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건강한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910년 록펠러 신디케이트가 당신들의 의료 산업을 장악하기 시작한 이래 시민들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오늘날 당신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다양한 병을 앓고 있는데, 이러한 질병의 원인을 추적해 나가 보면, 대부분의 경우 화학 및 제약 산업 독점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미국이 한 국가로서 존속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들은 건강한 국가를 되찾기 위해 뭉쳐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국가는 당신들이 국가적 자부심을 되찾도록 만들 것이며, 오늘날의 세상의 발명가이자 생산자로서, 그리고 자유에 대한 꿈과 희망의 수호자로서 당신들의 역할을 재개해 나가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무엇을 할 지 고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요? 당신들은 내게 조언을 구하지만, 설령 내가 무언가를 건네 준다고 하더라도 이를 그저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정도로 무시해 버리고 마는 내 주위 사람들처럼 행동하지는 않을까요? 그리고는 자신들의 육체가 난도질 당하도록 내버려 두고, 혹은 끔찍한 약물을 복용하지 않는 한 심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박 조율기를 삽입하곤 하는 행동을 계속해 나가지 않을까요? 당신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카르텔”은 거의 보유한 자산이 없는 이 작은 ‘피닉스 연구소[Phoenix Institute]’조차 장악하기를 원합니다--이 사실이 당신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연구소가 계속 기능하려면 우리는 실질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당신들의 헌정 질서를 회복하고, 당신들의 나라를 위대하게 만든 가치들을 되찾기 위해 개개인으로서 당신들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데이비드 록펠러는 현재 터너 네트워크[Turner network]의 이사회에 자리 잡아, 방송사가 무가치한 프로그램의 재방송이나 틀어주는 쓸모없는 방송사가 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조치들을 취해 나가고 있습니다--자유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온 제인 폰다[Jane Fonda]는 내쫓았습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또한 스미소니언 재단[the Smithsonian]의 미국 원주민 역사 박물관[Native American Museum of History] 건립을 위한 조정 이사회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존 덴버[John Denver]가 만든 환경 단체인 윈드스타[Windstar]에는 하수인들을 침투시켜 통제해 나가고 있습니다. 무지개 빛의 아름다운 단체들 속에 숨겨진 가시들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누가 당신들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여기 서술한 모든 내용들은 의회 도서관에서 모두 확인해 볼 수 있는 사항들입니다--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면 모든 사실들을 다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각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개별적인 행동을 취해 나가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총기 통제 법안은 수정 헌법 제 2조의 종말을 알리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당신들은 이내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가 무효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더 나쁜 것이 있다면, 당신들은 충분한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 채, “파나마 침공[invasion of Panama]”과 같은 사태가 발생해도 박수치며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에 대한 노예화가 완성되었을 때 당신들은 누구를 비난할 생각입니까?--하나님? 친구들이여, 나는 이를 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의 이러한 어리석음에 지쳤습니다! 실로 그러합니다.

 

다르마여, 이 장을 마무리합시다. 나는 당신이 계속해 나가기에는 너무 지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꼭 세상에 알려져야만 할 중요한 정보인 것입니다. 이 엄청난 작업을 수행해 낸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하나님의 빛의 자녀들이 승리할 것입니다. 비난받고 살해될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감히 진실을 말해 온 용감한 형제들을 위해 이제 우리가 앞장설 것입니다. 정직함 앞에 돌을 던지고, 이러한 글들을 두고 거짓이라 비난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머리를 어깨에 단단히 고정시켜 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당신들 주위로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바퀴가 마지막으로 구르기 시작하기 전에 때맞춰 깨어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설령 거짓의 편에 서 있던 자들이라 하더라도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AHO!

 

하톤은 대기중이며, 이번 접속은 이것으로 해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5권, “Rape of The Constitution ; Death of Freedom” 제 9장, pp. 8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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