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기록 #2 하톤
1994년 12월 5일 월요일, 9:36 A.M. 8년 111일
1994년 12월 5일 월요일
지금 이 세상은 최고의 세상이자 최악의 세상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Man of GOD]이 빛 속에서 자신의 여정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악마의 왕의 하수인들이 통제하는 완전히 물질적으로 경도된 세상에서 샛길로 빠져버릴 수도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지금은 예언자들이 이야기해 온 그리스도[Christ] 대 적-그리스도[Anti-Christ]간의 대결의 시기입니다. 그럼, 이것이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그건 전적으로 ‘인식[perception]’에 달린 문제입니다--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인식.
나는 지금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교자들”이 피로 물든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휴거[Raptures]나 구원[Salvation]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저마다 한 “인간”에 불과한 왕들과 독재자들이 만든 절대적인 규율 아래 속박된 채 살아가고 있는 각 개인들과 국가들을 상대로 진실과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한다면, 당신들은 다른 인간이 당신들을 “노예화” 상태로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 둔 것이 정작 무엇인지를 분간해 내는 능력조차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는 지금 “다른 종교”에 비해 어느 한 “종교”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알려진 모든 종교들은 “인간들”에 의해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순수한 것으로 각 개개인들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한 때 당신들은 어떤 것에 대해 제대로 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특정 언어를 사용하고, 용어의 “정의[Definitions]”를 훔치고, 무질서를 야기하는 자들의 입맛에 맞게 “원래의 뜻”을 변경시킴으로써, 당신들은 모든 균형과 이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정의’에 따르자면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소위 “현대화”된 책들 속에 나오는 ‘변경된 정의[definitions]’를 통해, 당신은 결코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오직 당신들이 받아들이도록 고안된 ‘새로운 개념’만을 알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럼, 그런 것이지요!
나는 유스타스 멀린스[Eustace Mullins]가 연구하고 간행한 책자 한 권을 건네 받았습니다. 이 책은 멀린스 자신이 최근에 쓴 글들과 무수한 역사적 진실로부터 얻은 정보들을 잘 정리하여, 제대로 된 한 권의 책으로 내 놓은 것입니다. 이 책은 당신들 거짓 속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제시해 보일 수 있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바로 당신들이 빼앗겼던 진실인 것입니다.
이 저서는 두 가지 주제를 기술적으로 잘 엮어 짰습니다 : 1) 기생충[parasites] 그리고 2) 하자르계 유태인[Khazarians].
이 책을 보내 온 사람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달았습니다 : “이 책은 최고의 저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은 양쪽 모두에게 있어 결정적인 시기로, 우리는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벌레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보내온 자의 이름은 익명으로 남길 것입니다. 우리는 유스타스 멀린스를 잘 알고 있으며, 어떤 독자라도 그의 글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그의 글에 대해 많은 개입없이 있는 그대로를 제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글은 이미 너무나도 많은 정보들을 담고 있어, 그 각각의 정보들에 일일이 다 접근하려면 수 천 페이지도 넘는 글들을 읽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팩트[FACT]입니다--우리는 결론을 유도하는 일에도, 구원에도,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Part 1의 인용]
생물학적 유태인[The Biological Jew]
by 유스타스 멀린스[Eustace Mullins]
제 1장
기생충[The Parasite]
우리 모두는 기생충을 끔찍한 것으로 여긴다. 기생충은 평생 하는 일이 다른 어떤 것을 희생시켜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용어를 인간에게 적용시켜 본다면, 그 또한 항상 역겨운 일이 될 것이다. 동물의 왕국에서도 기생충은 보편적으로 혐오의 대상이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The Oxford English Dictionary](1933년판)에서는 기생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생충 : 1. 타인을 희생시켜 먹고 살아가는 자 ;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
2. (생물학) (기술적으로 숙주[host]라 불리는) 다른 조직체 안 또는 위에서 살아가며, 그러한 조직체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는 동식물.
3. (비유적 표현) 자신의 역할이나 행동이 기생충과 닮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
요컨대 우리는 기생충이 숙주[host]라 불리는 다른 조직체 안 또는 위에 거주하며, 다른 것을 희생시켜 먹고 살아가는 혐오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 표현이 기생충과 같은 생활 패턴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위대한 문명이 남긴 기록 속에는 끊임없이 하나의 그룹 또는 같은 종류로 분류되는 일군의 인간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항상 혐오의 대상이 되면서도 자신들을 혐오하는 사람들 한 복판에 남아 있으며, 만약 내쫓겼을 때는 어떠한 비용이 들더라도 집요하게 다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항상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먹고 살아간다는 사실 또한 발견하게 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The Encyclopaedia Britannica]은 기생성[parasitism]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기생성--다른 종류의 두 조직체 사이에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 쪽으로부터 영양을 흡수하는 관계로, 숙주에게 일정 수준의 상처를 남기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관계 ; 나아가 이러한 관계는 기생충으로 하여금 먹이를 구하는 데 필요한 활동과 노력을 경감시켜, 단순성 또는 퇴행성을 촉진하거나 야기하는 경향을 가짐.”
많은 문명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기생적 그룹의 존재는 여러 측면들에 있어서 숙주가(주인이) 되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는 숙주 문명의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고, 그들의 에너지가 기생충들을 먹여 살리도록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숙주 문명의 사람들의 생존의 모든 측면들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숙주 문명이 파멸을 맞이하는 수준까지 약화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순수하게 동식물의 세계에서 기생충들이 갖는 생물학적 조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에, 기생충이 숙주에게 상처는 남기되 치명적이지는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경과하고 나면, 지금의 이 사례에 있어서도, 많은 동식물들이 기생충에 의해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러한 사실은 이에 대해 기술한 권위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학자들에게조차 분명하게 알려져 있진 않았던 것이다. [하톤: 자,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럼 당신들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원고를 모으고 편집하고 출판하는 자들은 누구일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기생충들에게 있어 먹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경감된다고 지적한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잘 알려진 기생적 그룹은 결코 농업에 종사하지 않으며, 음식을 찾아 사냥에 나선 적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신 음식은 숙주 문명의 사람들에 의해 기생적 그룹에게 제공된다. 또한 상기 저자가 지적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기생적 존재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기생충에 있어서 단순화와 퇴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기생적 그룹의 역사를 관찰해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숙주 문명의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의 삶을 살며, 단일 요소에 맞춰 삶의 주기가 단순화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숙주 문명을 찾아내 그 곳에 남고, 그 곳에 의지해서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기생적 그룹은 숙주 문명의 사람들 가운데 보다 도덕적으로 옳은 스탠스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끝없는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기생적 그룹은 모든 종류의 퇴폐적 행동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지적한 것처럼, 기생적 존재는 퇴보를 이끄는 것이다. 기생적 그룹은 직접 식량을 구하는 데 어떠한 어려움도 겪을 필요가 없기에, 시간이 남아 돌며, 비열한 행동을 추구하고, 숙주 문명의 사람들도 함께 타락시키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또한 기생충에 대한 아주 중요한 요인 한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건 숙주 속에 기생충이 머무는 장소에 관한 것이다. 브리태니커의 글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기생충들은 종종 숙주내 특별한 곳에 자리잡는다.”
기생충들은 일생의 단 한 가지 목표가 숙주 위에 남아 숙주를 이용해 먹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러한 삶이 가능한 장소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한 장소는 숙주가 쉽게 기생충을 떨쳐내 버릴 수 없는 곳이어야 하며, 또한 기생충이 별 노력 없이 계속 의지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장소여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기생충은 대개 숙주의 생식기관 또는 배설기관 속 또는 그 근처를 선택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기생적 그룹 또한 자신들의 거처를 숙주 문명의 재생산 또는 배설 기관과 가까운 곳으로 선택해 왔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들은 숙주 문명의 대도시들에 정착해 왔다. 그 나라가 주로 농업에 기반한 국가일 경우에는 주요 마을에 적절히 흩어졌던 것이다.
웹스터 사전 제3차 국제 판본[Webster’s Third International Dictionary]에서는 기생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2a. 다른 살아있는 조직체 안에 또는 그 위에서 살아가는 조직체로 자신에게 필요한 양분의 일부분 또는 전부를 다른 조직체로부터 얻으며, 통상적으로 일정 수준의 구조적 변화를 만들어 보일 수 있는 조직체.”
적응 능력[The Ability of Modify]
이것은 인류 역사상 기생적 그룹이 갖는 아주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생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기 자신들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왔다. 이들은 숙주 문명 속에 존속하기 위한 매우 세련된 기술들과 숙주 문명에 의지해 계속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정교한 방법들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이들은 그 곳에 남아 있을 수 있을만한 많은 종류의 구실들을 만들어 왔으며,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형태의 적응 능력을 보여 왔다.
웹스터 사전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기생충--3. 생존을 위해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면서도, 유용하거나 이에 걸맞는 대가를 만들어 내지 않는 생물학적 기생충과 유사한 어떤 것”(삽화 : 대도시는 그 나라의 기생충이다--프랑수아 봉디[Francois Bondy])
이는 인간 문명의 쇠퇴(타락)라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열쇠인 것이다. 기생충은 유용한 혹은 적절한 대가를 생산해 내지 않은 채, 생존을 위해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한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생적 그룹은 숙주 문명에 의지한 채 살아가면서도 결코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감사도 표하지 않는다. 기생충의 모토는 “항상 갖는다”이다. 잘 알려진 기생적 그룹에 관한 문학 작품 속에서 실제로 이러한 모토가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아마 놀라지 않을까?
자, 그럼 이제 우리는 독자들에게 묻는다--하나의 문명과 또 이어지는 문명이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어떤 그룹이 나타났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는가? 어떤 그룹이 숙주 문명의 사람들로부터 한결같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는가? 한 문명과 다른 문명의 몰락에 있어서 어떤 그룹이 항상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는가? 어떤 그룹이 모든 종류의 타락과 퇴보에 몰두하는가? 어떤 그룹이 숙주 문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특정 직업에 모여드는가? 어떤 그룹이 한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를 거부한 채, 또한 유용하고 적절한 대가를 제공하기를 거부한 채, “항상 갖는다”라는 자신들의 모토에만 집착하는가?
유태인[The Jews]이라 알려진 자들
이미 독자들이 짐작했겠지만, 이 그룹은 역사 전반에 걸쳐 유태인이라 알려져 있다. 지금의 이 연구가 있기 전까지 타인을 희생시켜 먹고 살아가는 개인이나 집단을 두고 종종 기생충이라고 불러왔지만 이러한 표현은 순수하게 사회학적 측면에서 사용된 것이지, 생물학적 관점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농장 주인들은 노예의 노동력으로 먹고 살았기에 기생충이라 불렸으며, 귀족들도 하인들의 노동을 기반으로 살아가기에 기생충이라 불려 왔다.
그렇지만, 모든 사례에 있어서 마찬가지이지만, 상기 언급한 기생충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의무와 역할을 수행해 왔다. 따라서 순수하게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아이들이라든지 너무 나이가 들어 일을 할 수 없는 노인들도 기생충이라 부를 수 있다. 그들은 분명히 타인의 희생으로 먹고 살아가고, 유용한 일을 수행하지 않으며, 적합한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그룹들은 과거에 유용한 일을 수행했거나, 혹은 미래에 그러한 일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 또한 생물학적 정의에 부합되는 기생충은 아닌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생물학적 참조틀에 아주 놀라운 수준으로 들어 맞는 자들로서, 모든 측면에 있어서 진정한 기생충 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유태인들이 남겨온 기록은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생물학적 기생충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또 다른 생물학적 측면들
우리는 자연 속의 기생충들이 종종 자신들의 생애 주기를 보통의 동식물들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D. T. 맥두걸[D. T. Macdougal]과 W. A. 캐넌[W. A. Cannon]이 쓴 ‘식물 속의 기생충의 조건들[The Conditions of Parasitism in Plants]’(워싱턴 카네기 재단[Carnegie Institution of Washington] 간행, 1910년판)이라는 책에는 크라메리아[Krameria]라는 식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미국 서부 사막 지대의 관목인 크라메리아는 몇 종류의 나무를 숙주로 삼아 살아가는 기생충과 같은 습생을 보인다. 언뜻 보기에 크라메리아는 기생 식물처럼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식물은 숙주 위에서 직접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 속으로 뻗어 있는 그 뿌리는 다른 숙주 식물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로부터 양분을 빨아 먹는 것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숙주 식물은 코빌레아 트리덴타타[Covillea tridentata]라는 식물인데, 사실 이 식물 또한 아카시아 나무나 다른 식물들을 숙주 삼아 살아가는 기생 식물이다. 과학자들을 놀라게 한 이 기생 식물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이 식물이 그렇게 깊은 뿌리를 갖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식물은 잿빛 관목으로 1년 중 특정 시기에만 잎과 열매를 맺는다.”
자연 상태의 기생충들은 종종 자신들만의 기생적 특성을 수행함에 있어서 다른 동식물들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스스로의 모습과 목적을 위장시키는 것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사실 기생충은 하나의 종(種)[species]이라기 보다는 다른 많은 종들을 먹이로 삼아 살아가는 일종의 ‘삶의 형태[a form of life]’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종이라는 측면에서 유태인에 대해 살펴보자면, 그들 또한 하나의 인종이라기 보다는 다른 모든 인종들을 먹이로 삼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제프리 라파지[Geoffrey LaPage]는 자신의 역작인 ‘기생 동물[Parasitic Animals]’(캠브리지 대학 출판사[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1년판, 1페이지)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기생 동물은 개별적인 하나의 동물의 종이 아니며, 특정한 삶의 방식을 채택한 동물에 해당한다.”
크라메리아가 자신들의 기생적 습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기에 깊은 뿌리를 갖지 않듯이, 우리는 유태인들 또한 숙주 문명의 사람들의 문화 속에 결코 깊은 뿌리를 내리지는 않으며, 자신들을 가장 표면적인 상태에 둔 채, 생존을 위해 가장 신속하게 이익을 남기는 측면에만 몰두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태인들 또한 문명화된 세상 속에서 특정한 인종이라고 보기 힘든 것이다. 그들은 일종의 기생적 삶의 방식을 채택했으며, 자신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숙주 문명 위에 존속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적응시켰을 뿐인 것이다.
라파지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다른 생물학적 용어들과는 달리, ‘기생충’ 그리고 그 형용사적 표현인 ‘기생적’이라는 단어들은 일상의 언어 속에 널리 사용되며, 통상적으로 감정적이자 도덕적으로 함축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과학은, 요컨대 생물학은, 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생물학자들의 접근법은 과학적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의 모든 호감과 비호감 그리고 모든 도덕적 판단은 배제한 채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는 기생 동식물들을 경멸하지도 존경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며, 찬성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냉정하게 이들의 생존 방식을 연구하며, 기생충의 섭생을 다른 많은 동식물들의 다양한 생존 방식들 가운데 한 가지로서 간주할 뿐이다.”
과학적 접근
우리는 과학적이며 감정적 판단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라파지 교수의 훈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생물학적 유태인’이라는 정의에 도달하게 된 것 또한 정확히 이러한 냉정한 연구에 기반한 것이다. 유태인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생물학적 현상에 대한 냉정한 연구를 통해서 만이, 우리는 이 기생적 존재가 보다 진보된 인간 문명 위에서 불가피하게 수행하는 해로운 영향력에 맞서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얻게 되길 희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톤 : 이는 절대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유태인[Jew]”이라는 표현은 1700년대 후반이 되기까지는 알려지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필연적으로 당신들은 현재와 같은 형태로 항상 존재하지는 않았던 현상(어쩌면 그보다는 차라리 오늘날에서야 마침내 인식하게 된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생충’은 항상 존재해 왔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걸쳐 대부분의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자신들의 이름을 많은 다양한 이름들로 불러왔으며, 최초에 이들은 자급자족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라파지 교수는 일반적으로 동물들의 결합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단일 종들 간의 결합으로, 떼를 지어 살아가는 동물들, 산호 군집, 벌 공동체 등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동일 영역에 다른 종들이 섞여 있는 결합이 있다. 기생적 습생을 갖는 동식물은 이 두번째 카테고리에 속한다. 한 동물 그룹은 일정 영역내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지만, 여기서 이득을 취하는 다른 기생적 그룹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기생적 습생의 아주 흥미로운 측면 가운데 한가지가 있다면, 기생적 그룹들은 대개 자연의 법칙이든 인간의 법칙이든 관습적 법칙들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후, 지리, 그 밖의 다수 그룹의 삶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여러가지 제한적인 요인들에 구속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요컨대 기생적 그룹은 자신들의 뿌리가 없는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지만, 숙주 동물이나 숙주 문명은 장시간에 걸쳐 해당 영역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뿌리를 내려왔던 것이다.
함께 식사하지 않기[Not Commensalism]
라파지는 또한 기생적 습생은 자주 접하게 되는 생물학적 용어로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공동 식사(편의 공생)[commensalism]’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는 소등쪼기새[the ox-picker birds]를 ‘공동 식사’의 사례로 들고 있는데, 이 새는 코뿔소, 코끼리 그 밖에도 아프리카 평원에 사는 거대한 동물들 등 위에 붙어 산다. 이 새들은 거대 동물들에게 들끓는 진드기, 이, 그 밖의 다양한 기생충들을 쪼아 먹을 뿐만 아니라 임박한 위험이 있을 때 경고를 주기도 한다.
영국의 경우, 우리는 찌르레기[starlings]와 양이 유사한 ‘공동 식사(편의 공생) 관계’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생물학적 용어로는 “함께 살기[living together]”를 의미하는 ‘공생[symbiosis]’ 현상도 발견하게 된다. 공생은 공동 식사보다 더 밀접한 생존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생리학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상대에게 일정한 먹이를 공급해 주며, 이러한 지원이 없이는 살아가기가 보다 힘들어지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지기도 하기에, 각각은 상호 의존적인 삶을 살게 된다.
라파지에 따르자면 기생은 적절한 먹이 공급을 위한 필요성에 기반해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공동 식사나 공생과 유사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기생은 기생충이라 불리는 한쪽이 다양한 방식을 통해 숙주라 불리는 다른 쪽의 육체로부터 직접 자신의 먹이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숙주라 불리는 다른 쪽은 이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이 있는가? 라파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숙주는 기생충으로부터 항상 해를 입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기생은 공동 식사나 공생과는 두 가지 측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 첫째, 양쪽이 아니라 오직 기생충에 해당하는 쪽만 먹이를 얻는다. 둘째, 양쪽이 아니라 오직 기생충에 해당하는 쪽만 이득을 보고, 숙주는 항상 해를 입는다.
생물의 진화
라파지는 최초의 기생충은 어쩌면 기생적 생물이 아니었지만, 일련의 루트를 통해 다른 동물의 체내로 들어간 후로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최초의 기생충은 다른 동물의 체내에서, 대개 양분이 풍부하고 소화하기도 쉬운 피와 같은 일종의 먹이들을 얻게 되었고, 이후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첫번째 기생충의 후손들 또한 동일한 삶의 방식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이후로는 다른 동물과의 결합이라는 삶의 방식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먹이를 얻는 방식으로서 ‘기생’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으며, 이제 이러한 방식을 따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이들은 생리학적으로 전적으로 숙주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의무적 기생충[obligatory parasite]”이 된 것이다. 라파지가 지적하는 것처럼 숙주는 이러한 기생충과의 결합을 수동적으로 감수하려 하지 않기에,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한 반응을 보인다. 라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숙주와 기생충간의 투쟁은 진화의 법칙을 따라 진행되어 왔으며, 이러한 싸움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숙주와 기생충간의 싸움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고 지적하면서, 라파지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하는 것인가?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기생은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죽이고 그 육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는 포식자와 피식자간의 관계와는 아주 다르다. 이 경우에는 포식자가 피식자보다 항상 더 크고 강한 것이다. 하지만, 기생충은 항상 숙주보다 더 작고 더 약한 것이 사실이다.”
자연의 법칙 위배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기생충은 기본적인 자연의 법칙에 다시 한 번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약한 개체는 강한 개체에게 잡아 먹혀 강한 개체에게 양분을 제공하게 된다. 결국 강한 개체가 약한 개체의 희생 속에 살아남고, 더 적합한 개체가 살아 남는 것,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기생충이 나타내 보이는 현상은, 약한 개체가 강한 개체의 희생 속에 살아남고, 덜 적합한 개체가 살아 남아 승리자가 되며, 더 강한 개체는 정복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생물학적 유태인들의 삶의 주기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측면이기도 하다. 역사를 살펴보면 유태인들은 항상 젠타일(유태인이 아닌--역주)[gentile] 숙주 문명의 사람들보다 더 작고 더 약했지만, 종종 이들을 정복해 왔다. 유명한 유태인 코메디언,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은 왜소한 약골이지만 항상 자신보다 더 크고 강한 젠타일의 상대방들을 따돌리고 무찌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접근 방식에 대한 칭송이 모든 유태계 유머, 문학작품, 예술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은 다윗[David]이 자기보다 더 큰 골리앗[Goliath]을 무찌르고, 교활한 모르드개[Mordecai](구약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인물--역주)가 자신보다 강한 젠타일 관리 하만[Haman]을 이기는 것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다윗은 당연히 작은 기생충이며 골리앗은 보다 큰 숙주에 해당한다. 골리앗은 약한 도전자를 상대로 자신의 월등한 힘을 발휘해 볼 기회도 갖기 전에 멀리서 돌을 맞고 쓰러지는 것이다.
일시적인 기생충
라파지는 숙주의 피를 빠는 모기나 거머리와 같은 곤충들을 “일시적인 기생충[temporary pasasites]”으로 분류한다. 이들은 외부기생충[ectoparasites]으로도 명명되는데 숙주의 체내로 들어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lice]와 같이 숙주의 피부에 붙어 사는 기생충들도 외부기생충으로 분류된다. 그 밖에도 다른 기생충(유태 왕조)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중복기생충[hyperparasites]이 있으며, 개미나 벌과 같은 다른 종들의 공동체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브루드 기생충[brood parasites](다른 새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낳아 기르는 방식에서 나온 표현--역주) 또는 사회적 기생충[social parasites]도 있다.
진화와 기생충
라파지는 모든 동물들은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어떠하든 점진적인 진화 과정을 통해 서서히 변모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기생충 또한 예외가 아니라며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한다 :
“기생충들은 숙주의 육체로부터 육즙과 응고제를 지속적으로 빨아들일 수 있는 흡입 장치의 일환으로 숙주의 조직 위로 계속 줄질을 가하는 이빨을 발전시켜 왔다. 희생 동물에 몰래 접근하여 피를 빠는 흡혈 박쥐들의 놀랄 만큼 교활한 방식도 일시적인 기생 습생으로부터 발전된 진화의 한 가지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흡혈 박쥐들은 소나 말 그 밖에도 인간과 가금류를 포함한 다른 동물들이 잠든 밤에 공격을 감행한다. 박쥐들은 희생 동물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다 이들이 잠들고 나면 살며시 다가가, 잠든 동물들이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심스럽게 살점 일부를 떼어 내고 피를 빨게 되며, 그러한 출혈은 다음 날 아침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특별히 발전시켜 온 그들의 역량 가운데 한 가지도 숙주 문명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채 그들의 피를 빠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목적 달성을 위해 수 세기에 걸쳐 개발해온 대단히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도구와 기술을 이용하여 숙주 문명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은 채 이들을 약화시켜 왔으며, 이같은 그들의 역량은 다른 종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견줄 수 있을만한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유태인들의 기술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깜짝 놀랄만한 사실이 있다면, 피를 빠는 유태인들로부터 가장 심각하게 착취당한 몇몇 젠타일들이 오히려 이들 유태인 “착취자들”을 가장 큰 소리로 보호하고, 이들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젠타일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험 또는 은밀한 기생충들의 공격 방식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생충들에게 특화된 능력
먹장어[hagfish]는 사이클로스토메스[Cyclostomes](턱이 없는 무악류 척추동물의 총칭--역주)의 일종으로 분류되며, 그 명칭의 연원은 입안의 원형 통로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라파지는 이 먹장어를 기생충의 일종으로 묘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이러한 물고기들은 모두 지렁이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칠성장어[lamprey]이다. 먹장어는 강력한 혓바닥 위에 두 줄의 이빨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입 천장 한 가운데에도 하나의 이빨을 갖고 있다. 먹장어의 눈은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지만 피부 아래에 숨겨져 있는데, 왜냐하면 먹장어는 자신이 공격하는 물고기의 살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며, 이 때 눈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유로 먹장어의 아가미는 긴 관을 통해 연결되며, 칠성장어의 아가미에 비해 신체의 훨씬 뒤 쪽의 피부 위에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먹장어는 자신이 기생하는 물고기의 육체 속으로 머리를 깊숙이 파묻게 되더라도 뒤 쪽의 아가미로 물을 들이키며 숨을 쉴 수가 있는 것이다. 먹장어 종류의 물고기들 가운데 어떤 종들은 서로서로를 공격하기도 한다. 이러한 먹장어들은 다른 살아있는 물고기를 한 번 물게 되면 재봉질을 하듯 입이 들러붙어 좀처럼 떼어낼 수 없게 된다. 이 때 그들은 물고기의 살점은 줄질을 해서 떼어 내고 그들의 피를 들이 마시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먹장어들은 물고기의 근육을 먹어 치우는데, 뼈와 내장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때까지 계속되며 결국 물고기는 죽고 만다.”
요컨대, 라파지의 설명들은 기생충이 숙주에 결코 치명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상의 기생성[Parasitism]에 대한 정의 및 학술적 기록과는 전적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하톤: 기생충이 숙주에게 전혀 치명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겨우살이[mistletoe](덩굴식물의 일종--역주)의 공격을 받는 떡갈나무를 지켜봐야만 할 것입니다--나무는 죽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의 피를 죽는 순간까지 빠는 먹장어의 활동은 고대 유태인들의 종교 의식에 따른 의식적 살해[ritual murder]와 아주 유사하다. 이러한 의식에서 대개 건강한 젠타일 희생자는 테이블 위에 묶이며, 그의 피부 위로는 의식에 따른 상처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의식을 찬양하는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기생적 존재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행위의 일종으로, 이 때 흘러내리는 피를 서로 나눠 마시는 것이다. 먹장어와 같은 기생충의 활동의 ‘사회적 재현[social re-enactment]’의 일환으로, 피를 나눠 마시는 의식은 젠타일 희생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여기서 우리는 동식물의 세계에서 기생충의 활동과 수 세기에 걸쳐 인간 문명 속에서 발전시켜 온 유태인들의 활동 간의 밀접한 상관 관계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라파지는 많은 거머리들은 접착 기관과 흡입 기관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어떤 기생성 동물들은 오직 접착 기관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기생성 동물들에게 발달된 갈고리[hooklets](벌레의 머리에 있는 갈고리 형태의 기관--역주)는 숙주의 배설 기관 또는 구강 기관에 들러붙을 때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숙주 문명의 사람들이 기생충과 같은 유태계 공동체를 떼어 놓으려고 할 때, 그들은 이 기생충이 특별한 접착 촉수들을 숙주 문명의 사람들의 삶의 모든 면면에 걸쳐서 깊숙이 부착해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촉수들은 너무나 깊숙이 박혀 있어서 떼어놓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를 제거하는 것은 숙주 문명에게 있어 치명적일 수도 있을 만큼 고통스러운 작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숙주 문명의 사람들은 유태인 은행가들에 의해 자신들의 재산이 저당 잡혀 있고, 자녀들은 유태인 교사들에게 교육받고 있으며, 정부는 유태인 “참모들” 또는 “고문들”에 의해 보좌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참모나 고문들은 선거에 의해 당선되거나 적절한 절차를 걸쳐 임명직에 앉게 된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숙주 문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에서 위안을 얻는데, 때때로 돈다발을 들고 나타나는 유태인 개종자들도 만나게 된다. 결국 이들 유태인들도 주요 종교 단체에서 다양한 성직을 차지하게 되지만,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유태계 종교인들은 각 교파들의 믿음을 변경시켜 유태인들(시오니스트들[Zionists]--저자)의 기생성 공동체의 모든 사조들도 교리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젠타일 숙주 문명에게 남겨진 일은 과연 무엇일까? 숙주 문명은 서서히 피를 빨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불가피한 운명에 처해지고 만다. 결국 파국을 맞이하고 나면, 기생충들은 이 숙주 문명을 떠나 또 다른 숙주 문명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
하톤: 여기서 잠깐 쉬도록 하겠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이러한 설명이 편협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특히 스스로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들은 지금 피가 마르는 순간까지 빨리고 있습니다--당신들이 지금 잘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멋진 유태인 친구들’일 것입니다.
당신들은 두 가지 사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 1) 당신들은 지금 여기서 서술한 바와 같이 외부의 기생충들로부터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 당신들의 내부 또한 기생충들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내부의 기생충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과 지시 사항들을 건네 줄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외부의” 적들부터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이며, 이는 당신들에게 달린 문제가 될 것입니다--내부의 적이든 외부의 적이든 실은 모두 당신들에게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접속을 해제합니다.
제 5장, 기록 #1 하톤
1994년 12월 6일 화요일, 8:46 A.M. 8년 112일
......
생물학적 유태인[The Biological Jew]
by 유스타스 멀린스[Eustace Mullins]
[Part 2의 인용]
성체[Adult Phases]가 된 기생충
라파지는 성체가 된 기생충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숙주의 육체 안에서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먹이로 둘러싸여 있고 이동 기관을 사용하지 않고도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유태인들 또한 교통 산업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주로 한 군데 머물러 있는 직업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기생충 공동체는 실제로 상당 기간 동안 숙주의 몸 안에서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있을 수 있으며, 또 점점 그렇게 변모해 간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전혀 소모하지 않은 채, 수면을 취하거나 수 년 동안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누워 지내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감염성 질병을 보유한 진드기는 땅 속에 백 년 동안 머물러 있을 수 있으며,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는 여전히 감염성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유태인 공동체도 젠타일 국가에 자리를 잡았을 때 숙주 문명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위험의 징후도 나타내 보이지 않은 채 100년도 넘게 머물러 있는다. 그렇지만 만약 젠타일 숙주 국가가 그들을 내쫓으려고 시도한다면, 그들은 즉각 이 도전에 맞서 숙주 국가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자신들의 특별한 적응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파지는 기생충들은 자연스럽게 정주 성향을 보이며, “이러한 생활 패턴에 맞는 변화를 보여준다”고 한다.
유태인 공동체도 기생충과 같은 생활 패턴의 결과로 정주성 삶에 맞는 습관들을 발전시켜 왔으며 이로 인해 정주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띤 몇 가지 질병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병들은 유태인들에게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 예컨대 당뇨병은 많은 의학 사전에서 “유태인 병[the Jewish disease]”으로도 불리는 것이다. [하톤: 그런데, 당뇨병이 왜 그렇게 흔한 것일까요? 췌장에 침투하여 살아가는 기생충들이 궁극적으로 인슐린의 생산 및 조정 능력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팀은 이처럼 죽음을 야기하는(장시간 고통을 수반하는 암이나 에이즈와 같은 질병들을 포함하여) 기생충들을 제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조치 사항들을 당신들에게 전하기 위해 부지런해 일해 왔습니다. 몸에서 기생충들을 제거하는 것은 가이안드리아나[Gaiandriana]와 같은 것을 통해 면역 체계를 완전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일을 용이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가이안드리아나나 다른 부가적인 것들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기생충을 먼저 제거해 보십시오. 이는 분명히 당신을 숙주로 삼고 있는 기생충들 때문인 것입니다. 모두가 기생충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당신들이 즐기는 정크 푸드를 통해서 유입되는 것입니다--당신들 모두는 체내에 건강한 기생충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암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기생충들이 발견됩니다.]
정주 생활과 기생적 삶은 유태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섭취하는 과도한 혈당을 소진하는 일을 방해하며, 이것이 당뇨병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혈당은 직접적인 에너지로 사용되는 데, 체내에 있는 과도한 당분은 당뇨병을 야기하게 된다. 또한 정주 생활을 해온 세대는 혈당 수치를 조정하는 데 책임이 있는 췌장과 다른 기관들의 기능 고장을 일으키거나 이 기관들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뇨병은 정주 생활을 해 온 사람들에게는 “세습되는” 질병이기도 한 것이다. [하톤: 그들 모두는 체내에 기생충들을 항상 보유하고 있습니다.]
유태인 공동체는 여러 가지 퇴행성 질환들을 발전시켜 왔는데, 예를 들어 혈액 질환, 다양한 형태의 암, 그 밖에도 육체적 퇴화와 관련된 증세들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질병들은 그들의 기생적 생존 방식과 그로 인한 육체적 퇴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그들이 젠타일 공동체와 함께 생활하면서 정주 생활이 점점 보편화됨에 따라, 이러한 퇴행성 질환들은 숙주 문명의 공동체 전반에서도 발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톤: 기생충들(당신들은 기생충은 물론이고 미생물 개체들의 생물학적 형태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은 보균자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직접 전달됩니다--에이즈, 감기, 독감, 요충[pinworms], 흡충[flukes], 구균[cocci] 등이 그러합니다.]
라파지는 유태인 공동체와 동식물의 세계에서 잘 알려진 기생충들간의 가장 중요한 물리적 상관 관계 가운데 하나로 다음을 지적한다 :
“기생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을 때, 종종 축소되거나 잃게 되는 기관들 가운데는 신경 기관이 있다. 전체적으로 감퇴될 수도 있으며, 주로 눈과 같은 기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활동적인 동물들은 먹이를 구하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감각 기관들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기생성 동물들은 상대적으로 안락한 삶을 살아가며 숙주 동물로부터 풍부한 먹이를 제공받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들이 점차 요구되지 않는다.”
기생적 생활 방식이 신경 기관에 미치는 영향은 많은 기생충들에게서 발견되며, 특히 유태인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이다. 신경 시스템의 퇴화는 전체 유태인들 가운데 평균적으로 약 30%에 달하는 유태인들에게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야기한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은 유태인 공동체의 내부적인 근친혼 때문일 것으로 오랫동안 간주해 왔다. 하지만 젠타일들과 교혼해 온 유태인 가문들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유태인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것과 거의 같은 비율로 정신 질환 사례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라파지 교수는 이러한 신경 시스템의 퇴화는 엄격하게 생물학적 연원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며, 기생적 생활 방식은 불가피하게 신경 시스템의 감소와 퇴화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골격 구조의 뚜렷한 변화
라파지 교수가 기생충에 관한 연구에서 밝힌 가장 놀랄만한 관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
“기생적 생활 방식은 골격 구조의 손실을 야기하고 이는 화석 상태로 보존되기에 충분한 뼈대를 남기지 못하기에, 우리는 기생성 동물들의 과거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매우 적은 지질학적 증거자료만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6종의 회충 화석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2종인 히도니우스 안티쿠스[Hydonius antiquus]와 H. 마투티누스[H. matutinus]는 시신세 갈탄[the Eocene lignite] 속에서, 나머지 4종은 발트산 호박[Baltic amber] 속에서 발견되었다.”
생존을 위한 큰 노력을 들이지 않는 기생충들의 삶의 방식은 대개 동물들이 사용하지 않거나 불필요해지면 그 신체적 특성이 위축되듯이 신경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장시간 반복될 경우 골격 구조 전반에도 변화를 야기하여, 부드럽고 무정형의 뼈대를 만들어 내며 이는 그 기생충의 사망 이후 이내 분해되어 버린다. 여기 기생충들의 삶의 주기와 유태인들의 삶의 주기간의 또 다른 주목할만한 상관 관계가 존재한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기생적 생활 방식으로 인해 고대 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견될만한 어떠한 가공품도 남기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아주 장기간 그러한 문명 속에 현존해 있었음에도 그러한 것이다.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입증해 줄 수 있을 만큼 그들의 특색이 담겨 있는 구체적인 가공 물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문화 유물들
우리는 지금껏 과거 위대했던 유태 문화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고 또 여전히 듣고 있기에, 고고학자들은 고대 문화 속에서 유태계 예술작품이나 조각 그리고 건축물에 해당하는 사례들, 오랜 시간과 자연 재해 속에서도 살아남은 명백한 증거들을 발견하기 위한 광범위한 노력을 펼쳐 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직 어떠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한 탐구의 유일한 결과물들은, 초기 문명이 나타났을 무렵 등장한 ‘도자기 물레[pottery wheel]’의 사용법을 아직 알지 못하던 석기 시대 시람들이 맨 손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몇 조각의 조악한 물그릇 형태의 토기들 뿐이다. 과거 위대했던 유태인들에 대한 이처럼 희소한 자료들은 유태인들이 추구했던 기생적 생존 방식, 즉 숙주의 희생 속에 살아가는 부드럽고 무정형적이며 뿌리없는 존재들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기록할만한 어떠한 구체적인 인공 물품도 남기지 않는 생존 방식에 대한 또 한 가지 증거라 할 수 있다.
라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몇 가지 기생충에 대한 기록은 인류가 기록을 남긴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파피루스에는 B.C. 1600년대부터 촌충[tapeworms], 주협혈충[blood flukes], 십이지장충[hookworms]에 대한 언급들이 남아 있다.”
말하자면 생물학적 기생충들은 역사 기록이 시작된 시기부터 인간들의 골치거리였던 것이다. 비록 인류는 기생충들로 인한 신체적인 불편이나 위험에 대해서 잘 알았지만, 유태인들의 기생 습성이 갖는 특별한 위험에 대해서는 그 시기가 너무 늦어질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라파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기생충들은 기생충이 아닌 동물들에게 노출될 위험이나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기생충들은 생존 공간과 풍부한 먹이를 얻지만, 숙주 동식물에 대한 부분적인 혹은 완전한 의존을 통해 이를 얻게 된다. 기생충들은 숙주를 발견하고 그 안 또는 그 위로 잠입해 들어간 다음, 이러한 기생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톤: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이제 진실을 마주할 때가 되었습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그 매개체가 되는 숙주 기생충이 애벌레 또는 성체 상태에서 손쉽게 혈관 속으로 유입될 때 함께 유입될 수 있으며, 체액을 통해 배설 기관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쉽게 유입될 수 있습니다. 요충[pinworms]과 같은 기생충들이 에이즈 바이러스를 옮기며 심지어 호흡 기관을 통해서도 전파됩니다. 따라서 당신들은 매개체가 되는 기생충들만 잘 제거해도 에이즈 바이러스를 완전히 격리시키거나 박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에 따라 유태인들은 다른 공동체들은 좀처럼 겪기 힘든 몇 가지 위험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위험은 하나의 공동체 전체를 상대로 한 ‘집단 학살의 위험’으로 숙주 문명의 사람들이 특정 공동체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발생한다. 유태인들은 역사상 대량 살육이나 대학살[pogroms]을 계속 되풀이하며 경험한 유일한 인간 공동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수 천 년이 넘는 기록된 역사 속에서 유태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기생 습성’[하톤 : 정치인들이나 변호사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직업은 그 정의에 있어서 ‘기생’과 거의 ‘동의어’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단 한 번도 자신들만의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태인들은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만한 정규군을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유태 국가인 이스라엘이 마침내 건설되었을 때, 이 나라 예산 구조는 이들이 그저 기생 공동체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예산의 70%는 해외로부터의 원조로 구성되었으며, 나머지 30%도 국채 판매 수익으로 채워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들의 국채는 무가치하며 결코 지불되지도 않는 것이다. [하톤: 멋진 친구 미국이 수십억 달러의 비용을 끝없이 현금으로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지역구 정치인들을 후원하는 단체들에게 돈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당신들이 그 “멋진 친구들” 아닐까요?]
증오
젠타일 숙주에 대한 이 완전한 의존성 때문에 유태계 기생충은 자신들에게 먹이와 생존 공간을 제공해 주는 이 ‘숙주 동물’로부터 깊은 증오와 경멸을 불러 일으키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증오는 오히려 유태 공동체를 방어하는 보호막 역할을 하며, 유태 공동체가 숙주 문명의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는 일을 막게 되는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을 때, 그는 어쩌면 유태인들의 기생적 현상에 초점을 맞췄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한 그룹이 최고 수준의 증오를 야기하게 될 때, 우정의 경우와는 상반되게도, 범죄적 방식은 보다 발전하게 된다.”
유태인들이야말로 최고 수준의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유일한 그룹이었기에, 스펜서 또한 이 유태인 기생충들을 지칭할 때,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숙주 문명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유태인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명백한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기생충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오직 수 천 년의 세월에 걸쳐 발전되고 확립되어 온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단순히 따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충돌은 이 두 가지 서로 분리되고 화해될 수 없는 윤리관으로부터 발생한다. 숙주 문명은 품위, 영예 그리고 자립[self-reliance]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반면, 기생충들은 자신들의 기생 습성으로부터 확립된 생활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배척에 대한 두려움, 또는 숙주 문명으로부터 내쫓길 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곧 자신들의 굶주림과 사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유태인들은 모든 것들을 자신들과 숙주 문명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기생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적응적 변화[Adaptive Modifications]
기생충들의 ‘적응적 변화’는 숙주에게 발생할 수 있는 변화를 예측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라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기생충들은 자신들의 삶을 숙주 동식물의 삶과 연계시킨다 ; 단성 간흡충[monogenetic fluke], 폴리스토마 인터게리뭄[polystoma integerrimum](양서류에 기생하는 기생충으로 숙주와 수명 주기를 동기화시키는 특징을 보유--역주)과 같은 기생충들은 개구리 방광 속에서 살아가는데, 성장 과정에 있는 올챙이들은 무시하다가 적절한 대상을 만나면 태도를 바꾸게 된다 ; 이들은 기회를 엿보면서 개구리 내부 아가미 주변의 주둥이처럼 생긴 주머니가 열릴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올챙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정 수준의 내부적 성장 단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 것인가? 이 기생충들은 눈을 통한 관찰과 신경 시스템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올챙이들이 물 속으로 분비하는 화학 물질을 통해 그들의 성장 단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성장 단계에 도달한 숙주를 알아보는 기생충들의 초감각적인 능력은 유태인들에게서도 항상 발견되는 특징이다. 유태인들은 태초부터 어떠한 오류도 없이 가장 발전되고 가장 유망한 문명을 향해 나아갔으며, 후진적이고 저개발된 문명은 무시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투리 우림[Ituri rain forest] 속에서 검소하고 엄격한 삶을 살아가는 피그미족들[the pygmies] 사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유태인들이 아닌, 샴페인을 곁들인 캐비어로 저녁을 먹으며 뉴욕의 안락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유태인들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Part 2 인용의 끝]
하톤: 글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여기서 잠시 멈추도록 합시다.
나는 당신들이 내게 잠시만 주목했으면 합니다. “유태인들”은 단지 한 무리의 선별적 혈통이나 같은 “종교”를 가진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이 보다 명확한 정의를 갖길 원합니다. 고이들[Goyim]은 유태인이 아닌 자들을 의미합니다--이는 어떠한 신도 섬기지 않는 자들(무신론자들--하톤)이거나 또는 비기독교적인 신(루시퍼[Lucifer]나 예호바[Jehovah]로 지칭되는 신--하톤)을 섬기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종교인들”이 모두 고이에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에 따르자면 “유태인 이외”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자들 또한 모두 유태인들입니다! (시오니스트-유태인들의 정의와 이디시어 번역에 따르자면). 요컨대, 당신이 기독교인이나 불교신자 또는 펜트코스트파[Pentecostal]가 아닌 다른 어떤 종교인이거나 혹은 스스로 종교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정의에 따라 당신 또한 유태인인 것입니다. 만약 내가 셈족의 후손[Semite]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다음과 내게 같이 물을 것입니다 : “당신은 자신이 셈족 출신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혈통은 유태인들이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당신들을 속이기 위해 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들은 셈족의 후손들이 아닌 것입니다!
자, 이제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허용과 같은 미사여구의 구름들 사이를 떠 다니는 당신들에게 제안합니다--자신이 하는 행동을 잘 살펴보십시오--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의 정의에 따르자면, 한 카테고리 또는 다른 한 카테고리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내가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며, 나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118권 (미간행 저널), 제 4-5장, pp.34-42, 46-50.
http://www.fourwinds10.com/unpublished_phoenix_journals
https://truthinligh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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